나에게 어머니는 꿈적도 하지 않는 거대한 바위 같았습니다. 처음 시댁에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탐탁지 않게 나를 보시던 눈길, 나를 압도하는 두툼한 허리와 팔, 아들만 셋을 두신 웃음끼 없는 표정,,,
그에 비해 가느다란 팔다리에 눈치 없이 그저 해맑은 웃음을 짓는 예비 며느리는 당신이 생각하기에 맏며느리 감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래도 아들이 좋아라 하니 승낙은 하셨겠지만 이후 어머님은 알게 모르게 혀를 찼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바위처럼 단단해 보였던 어머니가 쓰러졌던 날, 함께 한 30년의 세월이 훅 다가왔습니다. 그동안 아들만 둘을 낳으며 어머니의 외로움을 알았고, 속정이 깊은 어머니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다리 수술을 하고 한 달 가까이 간병인을 두고 입원기간이 끝날 때쯤, 퇴원 후 가시게 될 요양병원을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분명 어머니 성격에 집에 돌아가면 몸을 움직일게 뻔하고 그렇게 된다면 겨우 붙여 두었던 뼈가 어긋날 것은 자명한 사실이기에 취해진 조치였습니다.
우리는 시댁에서 가까운 요양병원에 발 빠르게 수속을 하고 어머니를 모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에 일어났습니다. 매일 새벽 2~3시에 아들들한테 전화를 걸어
"나 집에 가고 싶다.. 여기 싫다.. 나 좀 데려가라"
남편은 아침에 눈밑이 까매져 일어났고 그런 어머니를 힘들어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당신이 매일 새벽 전화를 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치매증상이 더 심해지고 있었습니다
의사 선생님과 상의를 해 보니 아직 뼈가 붙지 않아 몇 주간은 더 계셔야 한다고,, 집에 가서 잘못 움직이기라도 한다면 재수술을 해야 하지 모른다고 조기퇴원에 회의적 반응을 보였습니다.
우리는 돌아가면서 어머니와 더 자주 시간을 갖기로 했습니다. 집에 있는 듯 편안함을 주기 위해서 제가 선택한 방법은 그림책 낭독이었습니다
처음엔 색칠그림책으로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가 평상시 좋아했던 꽃, 동물, 옛 물건, 자연을 주제로 그려진 커다란 크기의 색칠 그림책과 색연필을 준비했습니다. 검정색으로 테두리를 친 그림 속에 색연필로 색을 채워 넣다 보면 흑백의 그림이 칼라색을 입힌 그림으로 완성됩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넌지시 어머니가 자주 들려주셨던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해방 후 만주에서 나와 고향 집성촌에 모여 살았던 이야기며, 동네 할머니들이 예쁘다며 자신의 단발머리를 쓰다듬던 이야기, 빳빳하게 다림질한 모시적삼을 멋지게 차려입고 집을 나섰던 친정아버지의 이야기까지,,
그렇게 이야기가 풀리면 그림책 낭독을 시작합니다. 병원침대에 누워 계신 어머니 옆에 걸터앉아 판형이 큰 그림책을 한 장씩 넘겨가며 읽어 드립니다.
시니어그림책 <할머니의 정원>(백화연 저)은 어머니가 좋아하는 그림체였고 내용도 현재 어머니의 사정과 흡사해 골랐습니다.
다리를 다쳐 어쩔 수 없이 가사도우미를 신청하게 된 경자 할머니. 하지만 첫 날 부터 집을 못찾아 지각한 민희 씨를 탐탁지 않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민희 씨는 경자 할머니의 투정과 불친절에도 따뜻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고 그런 민희 씨가 남편과 사별해 아이를 홀로 키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경자 할머니는 자신의 비틀린 마음을 부끄러워 하며 민희 씨와 점점 친하게 됩니다. 그런 두 사람은 제대로 손보지 못해 엉망이 된 마당의 꽃을 함께 가꾸게 됩니다. 다음 해 봄 날, 그동안 가꾼 나무와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나며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며 웃으면서 마무리 됩니다
그림책은 평생 세 번 만난다고 합니다. 아이 일 때 만나고 엄마가 되어 아이에게 읽어주면서 만나고 할머니가 되어 손자에게 읽어 줄 때 만납니다.
이제 한 번 더 추가해 봅니다. 더 이상 읽어 주지 못한 할머니를 위해서 그림책을 함께 읽어 주는 만남을요
"조금 더 크게 읽어 봐요~나도 듣고 있다우"
어머니와 그림책 읽기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건너편 침대에 죽은 듯 누워만 계셨던 할머니 한 분이 힘겹게 요청을 하십니다. 알고 보니 가만히 그림책 낭독소리를 듣고 계셨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약에 취해 잠만 자던 분들이 가만히 눈을 뜹니다. 그림책 낭독 소리에 추억을 되새김하며 각자의 꽃밭을 상상하시는 건 아닐까요
<할머니의 정원> 속 경자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머니는 자신도 집에 가고 싶다는 열망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단호하지만 나직하게 얘기하십니다
"왜 나한테는 안 물어보는 거니? 바로 앞에 내가 있는데 말이다"
어머니가 속상했던 이유가 밝혀졌습니다. 아픈 증세는 어떤지, 수술을 할지 말지, 요양병원에 가는 것에 대한 의논을 왜 자신에게는 묻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아,,, 우리는 누구도 어머니에게 묻지 않았습니다. 의사와 간호사는 함께 온 보호자와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우리는 어머니를 제쳐두고 수술과 요양병원을 결정했습니다
그 서운함이 곤히 자는 시간에 자신의 금쪽같은 자식들에게 전화를 걸었던 이유였습니다
나 여기 있다고!! 나 아직 결정권이 있는 사람이라고!!! 어머니의 외침을 우리는 외면했습니다. 아니 들으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죠.
우리는 예정된 퇴원 날짜보다 일찍 요양병원을 나왔습니다. 어머니와 충분히 이야기를 하고 약속을 받았습니다. 집에서 무리하게 움직이지 않기로 말이죠
하지만 오늘도 어머니는 아픈 다리를 끌며 밥을 하고 반찬을 만듭니다.
"아이고,, 어머니!! 이럴 줄 알았다니깐요"
뒤늦게 꽃을 피운 철쭉꽃 화분을 어루만지며 그저 어머니는 환하게 웃기만 합니다
오늘은 오랜만에 어머니와 그림책 낭독을 합니다. 일부러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왔습니다. 제가 선택한 책은 <적. 당. 한. 거. 리>(전소영 저)입니다. 가방에서 안경을 찾는 며느리 대신 어머니가 바로 책을 받아 소리 내어 읽어 줍니다.(며느리는 안경을 껴야 읽을 수 있어요 ㅠ)
며느리에게 읽어 주는 어머니의 그림책 낭독소리,,,눈물이 핑그르 돕니다
“네 화분들은 어쩜 그리 싱그러워?”
적당해서 그래. 뭐든 적당한 건 어렵지만 말이야.
적당한 햇빛, 적당한 흙, 적당한 물, 적당한 거리가 필요해.
우리네 사이처럼!
가슴이 먹먹해 지는 어머니의 그림책 낭독소리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적당한 관심과 사랑을 나눕니다. 함께 살아온 세월만큼 농익어 가는 사이,, 딱 그 정도의 적당한 거리가 좋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