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세 아이 육아기
'품 안에 자식'이라는 말이 있다.
초고령화 사회를 코앞에 두고,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황에 내던져진 젊은 세대들은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이다.
우연하게 캠핑에서 만난-나보다 나이가 어린-손위 동서가 뜬금없이 "결혼을 했으면 부부 경제력을 계산해서 아이 한둘은 책임 있게 낳아야 되는 거 아닌가요?" 란다.
자기는 아이가 둘이고 나는 셋인데, 자기 위안인지 우리 집에 대한 위로인지 잘 모르겠다.
언제부터인지 아이 셋 둔 부모를 '애국자'로 부른다.
언 발에 오줌 누기 식으로 찔끔찔끔 던져주는 육아정책금은 아이가 크면서 점점 눈 녹듯이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부모 대신 마치 국가가 책임질 것처럼 생색내더니 이제는 그 부모의 연금마저 뜯어 가려고 한다.)
이런저런 평소 단상을 동서에게 일러주고 되돌아보니 일곱 살 적 막내둥이는 자정이 가까워 오는데도 산 중턱에서 정신없이 뛰어노느라 여념이 없다.
"마스크 써라", "손 씻어라", "불장난하지 마라", 아무리 일러도 이미 말로는 통제가 안 되는 나이다.
이튿날 아침, 곤히 잠든 막내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머리칼과 등, 발바닥 등을 어루만져 본다.
자식은 엄지와 검지를 구부려 양쪽 엉덩이의 피크에 닿을 때까지만 자식이다.
그보다 더 크면 내 자식이 아니다, 우주를 경영하는 우주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