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운 다섯살 인생
세 살. 한참 언어 습득 능력 폭발하는 시기에 미국이라니 얼마나 좋아?
안타깝게도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2년이 지난 후 한국에 돌아왔을 때 아이는 오히려 영어 거부증이 생겨버렸다. 모든 사람이 다 한국어를 하니 한국이 훨씬 좋다고 했다. 친구들 보러 다시 가고 싶지 않냐 물어도 딱 잘라 거절했다. "나는 영어 싫어. 미국도 안 갈 거야."
미국에서의 공식 기관 생활은 고작 4개월. 영혼의 단짝 동갑내기 한국 친구와, 한인성당 언니들과 하루가 멀다 하고 열심히 놀았으니 한국어만 열심히 늘 수밖에. 그럼에도 일단 나가면 보고 듣고 환경의 영향은 무시하지 못하는 법이다. 귀국할 무렵에는 처음 만나는 또래 아이와 어른 도움 없이 어떻게든 같이 어울리기도 하고, 자주 만나는 혼혈 친구들 덕분에 영어 한국어 섞어가며 대화를 하기도 했다.
애초에 영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일 뿐이라고, 아이가 살아갈 미래에는 실시간 통번역이 가능할 거라고, 우리 부부는 아이의 영어 교육에는 한없이 관대했다. 스트레스 없이 아이의 영어가 늘 수밖에 없는 그 환경에 딱 2년만 더 있을 수 있다면 싶었지만, 우리는 2년 시한부 미국 생활이니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건 나중에 아이가 왜 그때 조금 더 쉽게 영어를 익힐 수 있게 도와주지 않았느냐 원망한다면,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얻어 왔으니 이해해달라 말해 볼 요량으로 기록하는 글이다.
첫 번째는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이다. 아이가 태어난 후 바로 중환자실에 입원하는 바람에 매일 30분씩 면회하던 때 이후로는 평일에 아빠 얼굴을 보는 것조차 힘든 날이 많았다. 미국 생활이 시작되고 좋든 싫든 우리 셋은 일주일에 몇 번, 수업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항상 함께였다. 비록 만난 이후로 처음 가진 이 함께인 시간에 적응하느라 우리 부부는 많이도 부딪히기는 했지만, 아이와 아빠는 확실히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아빠와의 놀이 경험이 중요하다는 3살에서 5살의 시간에 언제고 원할 때 아빠가 집에 있다는 건 아이에게 안정감도 더해줬다. 집에 있는 시간의 반 이상이 잠 혹은 공부였지만 그럼에도 출근하는 아빠 뒤통수에 대고 매일 같은 말을 하는 지금보다야 훨씬 나았다. 아이는 오늘도 외쳤다. "아빠 오늘은 말로만 말고 꼭! 꼭! 일찍 와야 해."
두 번째는 자연과 어우러지는 방법을 배운 것. 미세먼지 없는 파란 하늘 성애자인 엄마 때문에 아이는 질리도록 자연과 함께였다. 문만 열고 나가도 사슴과 청설모, 너구리가 돌아다니는 기숙사. Garden State라는 이름답게 넓고 아름다운 공원이 가득해 기분 따라, 날씨 따라 골라갈 수 있는 뉴저지. 부러 어딘가를 찾아가지 않아도, 어디를 가던 넓고 여유로운 자연이 함께인 그곳에서 아이의 생각과 마음의 크기도 같이 넓어졌다. 우리는 어디서건 주저앉아 돌멩이로, 나뭇가지로 모양을 만들었고, 들꽃들을 모아 서로에게 선물했다. 가을이면 알록달록 낙엽들을 한가득 주워와 사자 얼굴을 만들고, 겨울에는 물감으로 눈을 물들이며 깔깔댔다.
그렇게 자연과, 친구와 어울리며 아이는 그야말로 마음껏 놀았다. 그대로 한국이었다면 대부분 그랬듯 3살 무렵부터 기관에 보내고 주위에서 들리는 말들에 흔들리다 덜컥 사교육 시장에 뛰어들었을지도 모른다. 세 번째로 아이가 얻은 건 마음껏 놀아본 경험. 책을 가까이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어 출국 전 잔뜩 구매한 전집들과 자연물로 하는 미술놀이들 외에 아이는 늘 자유였다. 친구와 놀고 싶다면 친구와 만나게 해 주고 놀이터에 가고 싶다면 놀이터로, 종일 뒹굴고 싶다면 질리도록 그냥 뒹굴게 뒀다. 아이는 설거지하는 내 옆에 비치의자 가져다 놓고 선글라스 쓰고 앉아서는 '엄마 나 부럽지? 놀고 싶으면 놀고먹고 싶으면 먹고 뒹굴고 싶으면 뒹구니까.' 했다.
아이가 얻은 네 번째는 여행과 경험. 사실 뭐든 직접 경험해 보는 게 최고의 배움이라는 철칙을 가진 엄마 덕에 한국에서도 우린 늘 바쁘기는 했다. 미국에서는? 세 배쯤은 더 바빴다. 2년 후에는 돌아가야 하니 있는 동안 모든 걸 다 해봐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으로 아이를 재우고 매일 갈 곳을 검색했다. 남편의 시간도 여유롭고, 기동력을 갖춘 친구도 늘 함께이니 정말 바지런히 다녔다. 남편과 농담처럼 얘기했다. 부러운 꼬맹이 인생. 미국의 동남단 키웨스트의 바다를 바라보며 그네를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가 내려다 보이는 호텔 침대에 누워 뒹굴고,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 호카 곶의 탑에서 외국인 언니와 숨바꼭질을 하고, 칸쿤 호텔에서 본 마이클 잭슨 춤을 흉내 내고, 디즈니 공주들과 찍은 사진들을 가진 다섯 살 아이 인생. 여기 적지 못하는 수많은 다양한 경험들은 분명 어딘가에 남아 아이가 어른으로 자라는 데 자양분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결실은 열린 마음. 미국에서 두 달 정도 아이가 친구와 함께 발레를 배울 때였다. 아무리 키즈카페의 비공식적 발레교실이라지만 고도비만의 발레 선생님을 만났을 때 엄마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들만! 당황하고 아이들에게는 그저 같은 '선생님'이었다. 역시 미국이구나, 아이들은 때 묻지 않았구나, 우리는 뒤늦은 반성을 했다.
영어를 하지 못해도 아이는 일단 외국인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워낙 다양한 인종들이 섞여 살았던 뉴저지에 있었기 때문인지 인종에 대한 편견도 아예 없다. 아이가 지금 하고 있는 화상영어 수업(전에 없던 영어 교육에 대한 욕심이 생겨서가 아니다. 아이가 하고 싶다고 요청했다.)에서 인기 강사들은 대부분 하얀 피부를 가졌다. 처음 수업을 시작할 때 수많은 강사들의 소개 영상을 신중하게 보고 아이는 웃지 않으면 꽤나 날카로워 보이는 흑인 여자 선생님과 수업을 하고 싶다고 했다. 몇 주 간 동생의 결혼식으로 수업을 쉬었던 선생님과 다시 수업을 한 날 대수롭지 않게 아이는 말했다. "선생님 휴가 갔다 와서 좀 탄 거 같은데?" 지금 아이와 선생님은 둘도 없는 절친이다. 아직 세상의 기준을 알기 전 어린 나이에 수많은 다양성을 자연스레 인정하게 된 아이에게 엄마의 때 탄 잣대가 스며들지 않게 항상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
아이는 2년 동안 익숙해진 누군가와는 헤어지고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삶의 수많은 이별과 만남을 이해했고 그리움을 배웠다. 언제고 찾아 가면 반갑게 맞아줄 소중한 인연들이 지구 반대편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참 많은 것을 얻었으니, 딸아 그 시간을 감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