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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하바 Oct 24. 2021

다시 만나기 위한 약속일 거야

모두에게 안녕,



"아 한국 가기 싫다." 귀국 시간이 다가올수록 우리 부부는 하루에도 몇 번씩 눈만 마주치면 중얼거렸다. 어떻게든 미국에 남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를 치열하게 고민하던 시간. 사실 무조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둘 모두 알고 있었지만, 희망 회로라도 돌려보고 싶었다고나 할까. 


미세먼지 없는 파란 하늘, 사계절 예쁜 자연,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시간. 아쉽지 않은 것이 없었다. 운전 초보로서는 어딜 가든 대부분 넓고 편한 주차장도 아쉬웠고, 육식파 남편과 아이를 둔 주부로서는 저렴하고 맛있는 미국산 소고기마저도 아쉬웠다. 따로 기관에 다니거나 공부를 시키지 않아도 환경 덕분에 자연스레 영어가 늘고 있는 아이를 보자면, 정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3년 정도만 더 있을 수만 있다면 싶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쉬운 것은 단연코 사람들. 기숙사로 들어간 지 3일 만에 만나 영혼의 단짝이 된 나와 아이의 소중한 친구. 기숙사 이웃들, 성당 사람들, 온라인과 아이 유치원을 통해 맺어진 소중한 친구들. 미국에 살다 보면 만남과 헤어짐은 익숙해져야만 하는 일이라고 들 이야기하면서도, 우리 못지않게 아쉬워해주는 고마운 사람들과의 안녕은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송별회만 몇 번을 한 건지 모르겠다. 기숙사 친구들과의 송별회는 나의 최애 음식 중 하나인데도, 뜨거운 데 아이 델까 위험하다고 남편이 못 먹게 하던 훠궈와 함께. 동생들은 생각하지도 않았던 선물까지 안겨주었다. 


성당분들과는 성당에서 한 번, 구역 모임으로 두 번, 친한 분들과 포코노 1박 2일 여행으로 세 번. 양가 도움 없이 육아하며 사는 터라, 한국 돌아가면 갖기 힘든 시간일 테니 부부 둘이서만 시간 좀 보내라는 언니, 오빠들 마음 담은 배려까지 더 해져 단 둘이 와이너리 데이트라는 세상 귀한 시간까지 선물 받았다. 그러고도 성당분들과의 송별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아이를 정말 예뻐해 주던 언니가 직접 요리까지 다 해서 사람들 불러 또 한 번. 감사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음이 죄송할 정도로 감사했던 그 마음을 아직 잊지 못한다. 




친구와는 뉴욕 자유부인 1박 여행을 다녀왔고, 남편들 아이들 더해 다 같이 펜실베이니아 여행도 다녀왔다. 또 다른 친구 가족과는 우리 가족 첫 캠핑이자, 이별 여행으로 1박 2일 캠핑을 다녀왔다. 크리스마스니 생일이면 함께 모여 시간을 보내던 네 가족은 한 친구네 집에 모여 다 함께 이틀을 보내며 지난 추억들을 이야기하느라 밤을 지새웠다. 기숙사에서 만난 친구, SNS를 통해서 만난 친구, 아이 유치원 같은 반 친구. 나를 통해 연결된 세 명의 친구들은 "언니가 너무 소중한 인연을 선물해 주고 간다"며 만날 때마다 우리 생각이 날 거라는 말로 나를 울렸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도 종종 함께 만날 때면 언니가 그립다며 연락을 한다. 



친구들과의 마지막 여행 그리고 그간의 추억들이 담긴 친구가 꾸민 송별회 데코



기숙사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에는 아이와 둘이서 우리끼리 기념식도 했다. 패밀리 기숙사가 있는 캠퍼스에는 아이와 나만의 산책 코스가 있다. 아이 낮잠 재우러 유모차 타고 돌기도 하고, 자연물 놀이한다며 종이가방 들고 나뭇잎이나 열매를 줍기도 하고, 아빠 마중 간다며 걷던 길들. 한 곳 한 곳 천천히 눈에도 담고, 사진에도 담으며 걸었다. 우리 둘이 가끔 데이트하던 캠퍼스 카페에서 우리는 지난 사진들을 함께 살펴봤다. 세 살 아기에서 다섯 살 언니가 되어버린 시간이 담긴 곳. "내가 여기서 이렇게 했었잖아. 엄마엄마, 여기 전에는 길이 있었는데 풀들이 길을 가려버렸네?" 종알종알 지난 추억들을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어느새 아이는 쑥 자라 있었다. 



세 살, 네 살, 다섯 살 캠퍼스에서의 마지막 날.



우리 가족끼리 보내는 미국과의 송별회는 뉴욕이었다. 뉴욕을 그렇게나 싫어했던 남편이 마지막 여행지로 뉴욕을 선택한 것은 꽤나 의외였다. 전에 아이에게 약속했던 브루클린의 회전목마를 핑계로 삼았지만, 사실 나는 알았다. 그도 뉴욕과 사랑에 빠졌음을. 언제고 다시 오면 된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뉴욕은 계속 아쉬웠다. 가보고 싶었던 곳들이 너무나 많았는데 운전대를 잡은 남편에게 선택권이 있으니 가보지 못한 곳들이 족히 열 손가락은 훨씬 넘었다. 


브루클린 브릿지가 내려다 보이는 건물 선베드에 앉아 아이와 약속했다. 나중에 아이가 스무 살이 되면 꼭 둘이서 같이 다시 뉴욕에 여행을 오자고. 





귀국 전 날 밤은 친구네 집에서 함께 보내기로 했다. 사실 익숙한 기숙사에서 자고 아침에 출발하는 편이 더 편하기야 할 테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 마지막 아침 따뜻한 밥이라도 한 끼 챙겨주고 싶은 친구의 마음이 고마웠다. 친구의 권유는 현실적으로도 너무 큰 도움이 되었다. 마지막 날 통신사며 헬스장, 은행, 귀국 선물 사러 쇼핑몰까지 정신없는 우리 부부 대신 작별인사를 하러 온 친구들이 아이를 챙겨 주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기숙사를 두고 공항으로 가는 것보다는, 택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 흔들어 주는 친구 가족이 있는 편이 훨씬 따뜻한 마지막이기도 했다.


친구들과의 헤어짐은 사실 우리보다도 다섯 살 아이에게 훨씬 힘들었을 거다. 이제 한국 가면 못 만나는 거냐며 아이는 몇 주 동안 묻고, 확인하고를 반복했다. 갑자기 친구들이 보고 싶을 것 같다며 울기도 하고, 우리 꼭 다시 미국 와서 친구들 만나야 한다고 다짐을 받기도 했다. 이제 고작 다섯 살 일 뿐인데 미국으로 올 때도 가족들, 친구들과 헤어지며 울고, 다시 돌아갈 때도 친구들과 이별이 힘들고. 이별의 아픔을 너무 어린 나이에 너무 자주 겪게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친한 친구들 몽땅 찾아와 함께 보낸 마지막 날, 아이는 참 많이 웃었고 참 많이 행복했다. 


어른들 애써 눌러둔 서운한 마음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아이 친구의 눈물에 터져버렸다. 평소 마냥 밝고 씩씩한 아이인데, 종일 웃으며 놀다 헤어질 시간이 되자 엉엉 울며 '이모, 한국에 가지 않으면 안 돼?' 묻는다. 울지 않으려 했던 우리도 아이의 눈물에 눈물 버튼이 눌려 버렸다. 1년에 한 번은 우리가 미국으로 오고, 다음 해에는 너네가 한국으로 와서 만나자고 손가락 걸고 약속하고서도 훌쩍이며 차에 타는 아이의 순수한 사랑이 너무나 소중하고 고마웠다. 



우정룩 맞춰 입고 사진도 찍고, 다함께 신나게 놀았던 시간




아이들과 우리가 눈물의 이별을 하는 동안, 남편은 마지막으로 기숙사를 방문해 최종 정리를 했다. 처음 기숙사에 도착했던 날의 충격 때문에 첫 사진은 하나도 없지만, 1년 반 동안 몸 담았던 기숙사의 마지막 모습은 사진으로 남겨달라 부탁했다. 비록 대부분의 짐들이 빠져 우리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지만 말이다. 침대 난간 틈으로 자던 아이가 떨어져 놀랐던 일, 고기 굽다 파이어 알람이 울려 뛰쳐나갔던 일, 수시로 거실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아이 때문에 카펫 스팀 청소기를 매일 같이 돌렸던 일들이 사진 속에 담겨 있었다. 



없던 허리병도 생기게하는 침대 / 좁디좁은 주방 / 색바랜 카페트와 소파를 가진 거실



특히나 아이 놀이방으로 사용했던 작은 방은 반복되는 누수 문제 때문에 결국 사는 동안 한 달 이상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하고 붙박이장까지 뜯어내는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해야만 했지만, 남편이 보낸 사진은 그냥 왠지 찡하기만 했다. 









그렇게 길다면 길고 짧다면 마냥 짧은, 2년간의 긴 여행 같은 미국 생활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할 때에는 가장 아쉬운 건 역시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귀국하고 다시 또 2년의 시간이 지나고 보니 SNS로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는 우리는, 서울에서 뉴욕까지 11,000km 정도의 거리가 무색할 만큼 여전히 가깝게 느껴진다. 물론 직접 만나지 못함이 아쉬운 순간들이 많기는 하지만 말이다. 


오히려 가장 그립고도 아쉬운 건 그 시간, 그곳의 우리인 것 같다. 아직 아기 티가 나는 내 아기. 조금 더 젊은 우리.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 속의 우리. 지금 우리가 여전히 미국이었다 해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간 속의 우리를 그때의 사진들과 함께 글 속에 담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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