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두 딸의 엄마
술을 먹다가 팔이 부러졌지만 , 친구들의 도움을 받으며 술을 마신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있다. 심지어 우리 부서엔 그런 사람들이 차고 넘쳤다. 그래서인지 간혹 겁 없이 우리 부서에 술로 도전했던 타 부서 직원들이 제발 집에만 보내달라며 새벽까지 호프집, 치킨집을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모습을 봤다는 소문만 무성하게 들릴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신입 사원이 입사하게 되면, 선배들은 신입을 에워싸며 “ 술은 어느 정도?”마시냐고 묻곤 했는데, 사실 대답이 중요하지 않았다. 선배들은 웃고 있는 신입의 대답과 상관없이 뒤에서 예언을 하곤 했기 때문이었다.
“조만간 애인이 있다면 6개월 내에 애인과 헤어지게 되고 일 년 내에 술독에 빠져 살게 될지니… “
그렇다면 그 부서의 과장이라면? 자신이 술꾼 부서의 과장이라는 사실을 증명이라고 하듯 밤새 술 먹다가 이번엔 발목이 꺾여서 깁스를 한 J과장님이 목발을 짚으며 사무실로 출근했다.
퀭한 눈과 며칠 감지 못한 머리카락을 보면 분명 휴먼이었지만, 혼자서 힘들게 보행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걱정되어 물었다.
"과장 휴먼 아 유 올라잇?"
"올 라잇이 아니고 올 나이트였다!"
간신히 자기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기보단 몸져누운 휴먼을 보고 나는 놀라서 물었다.
"에이 설마 그 상태를 하고 또 어제 술 마셨어? 의사 선생님이 마셔도 된데?"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아직 내가 사회생활을 모른다는 표정으로 찡끗 웃더니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내가 나의 의사다! 내 몸을 알코올로 소독하리라!"
알코올로 자기 몸을 소독하다니 어이가 없기도 했고, 미스트를 뿌리며 나는 알코올 냄새에 헛구역질을 하는듯한 그녀의 모습에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렇게 J과장을 이해하지 못했던 나도 어느새 시간이 흘러 목감기 걸렸을 때는 깡 소주로 소독을, 진상 손님을 만났을 때 속 시원하게 내려주는 쌩 맥주를, 비 오는 날에 목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쎈 막걸리를 마시며 내 영혼을 소독하는 법을 배웠다. 누가 그랬던가? 운전은 초보때 사고가 나는 게 아니라 운전이 익숙할 때쯤 사고를 한번 친다는…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호텔 예약실에 이상한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시작은….
"새벽 4시, 양화대교에서 만난
마스카라가 눈 밑으로 번진
여자 둘 그중에.. 한 명“
이었다. 그리고 그 소문으로 인해 어떤 이는 더 이상 자이언티의 양화대교를 듣지 못하게 되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이 새벽에 누구야?를 외치며 전화를 받았는데 전화기 너머로 떨리는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선배님... 지금 양화대교 건너세요?"
"응? 어..어찌 알았지?"
나는 당황하며 주변을 돌아봤고 신호를 받아 막 출발한 택시에 후배의 얼굴이 빼꼼히 나와서 나와 내 친구 얼굴이 가관이라는 듯 흠칫 놀라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아... 선배님... 어떻게... 이 새벽에.."
"아.. 어.. 그게.. 산책해 친한 친구와.."
새벽 4시에 친구와 양화대교 산책이라니 너무 어처구니없는 변명이었지만 막상 떠오른 말은 그게 전부였다. 입사 세 달 밖에 안된 신입 직원이 하늘 같았던 선배가 술에 만취해 양화대교를 건너는 모습을 보며 이 회사의 미래는 괜찮을까? 하며 자연스럽게 퇴사를 떠올렸다고 한다.
또한, 산책을 한다고 하기엔 다소 부담스러운 화려한 꽃무늬 원피스와 마스카라가 눈두덩이 아래로 사방으로 번진 여자 둘이 미친 듯 웃으며 뛰고 있는 모습이 어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뇌리에 박힌 듯 생생하다고 증언하곤 했다.
굳이 변명을 해보자면, 시작은 분명 3년 사귀던 남자에게 실연당한 지현이와 정규직 전환을 하지 못하고 다시 1년을 계약직으로 일해야 한다고 통보받는 나와의 알코올 소독식이었다. 그렇게 거창하게 홍대에서 시작한 소독식은 사장님이 여자들이 이렇게 많이 마시는 건 처음 보았다며 새벽 3시 30에 억지로 내보내는 바람에 허무하게 끝이 났다.
우리의 예상과는 다른 시간에 술집에서 쫓겨나니 첫차가 없기도 했거니와 한참 취기가 오른 지현은 한강공원까지 걸어가 보자며 다짜고짜 주먹을 불끈 쥐고 크로스를 외쳤고, 나 또한 이에 질세라 나의 한 팔을 친구와 교차하며 만취 동행의 맹세를 외쳤다.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상상 속 우리의 모습은 속이 꽉 찼던 배추가 사회의 쓴 맛과 연애의 짠맛에 숨이 죽어 들었지만, 알코올 때려 붓자 갑자기 샘솟는 용기로 인해 "이렇게 절여져 봤자 김치 밖에 더 되겠어? “라며 갑자기 자신의 몸에 멋짐의 고춧가루를 뿌리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분명 양화대교를 건너 한강공원에 도착할 때만 해도 우리의 모습은 태양은 없다의 정우성 이정재였으나 한강공원에 도착해 화장실에 서 마주친 지현이와 내 모습은 미친년 그 자체였다. 얼마나 울고 웃었는지 마스카라 자국이 짙게 눈밑으로 고드름처럼 내려와 있었으며 립스틱을 술김에 몇 번이나 손등으로 문질렀는지 매운 음식 먹다가 벌게진 입술 같았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마주한 순간 후배가 새벽에 마주했을 내 모습과 친구가 몇 번이나 전 연인에게 전화를 거는 모습이 청소차처럼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그렇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화장실에서 말없는 이별을 고했다. 차라리 끝까지 멋있게 끝나기라도 하던지… 남은 현실은 더 잔인했다. 외박하고 새벽에 몰래 집에 들어가야는 문제가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해가 이제 막 고개를 내민 시간이었기도 했고, 지금의 내 상태에서 운동을 갔다 왔다기엔 다소 과한 옷차림이 분명했다. 어떤 변명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곳이 지옥문이라도 들어가 보자며, 눈을 질끈 감고 간신히 현관문을 조금 열어 얼굴을 빼꼼 내밀었는데…아뿔싸. 내 시선의 끝에 언니의 빨간색 구두가 현관이 아닌 언니 방문 앞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아... 씨.. 나만 기어 들어온 게 아니었네.."
싸늘함에 고개를 들어 빛이 번쩍이는 곳을 쳐다보니 그곳에 엄마가 나를 한심한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상에 두 딸을 키운다는 건 두 배의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듯이…. 엄마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더니 손가락으로 부엌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이미 일차전이 끝내고 놓여있는 밥풀 가득한 밥그릇과 국그릇이 놓여있었고, 바로 맞은편에 이제 막 끓여 김이 모락모락 나는 된장국이 놓여있었다.
하얀 쌀밥옆에 놓인 된장국의 구수한 냄새를 맡으니 알코올로 버린 쓰린 속이 빨리 된장을 내려달라고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나는 눈치 볼 것 없이 식탁에 달려가 허겁지겁 국을 마시며 무언의 눈빛 압박을 느꼈다.
"아니.. 그러니까.. 지현이가.. 실연을 당해서 위로를... 해주려고..."
"....."
"그러니까 친구가 소금에 절여졌는데 어떻게 모른척해 나도 소금에 절인 배추다라고 하면서 위로를..."
"... 휴.. 그거 먹고 들어가 자라"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은 둘째 딸의 모습 때문인지 아니면 일 차전에서 이미 체력을 소모한 덕분인지 엄마는 안방으로 들어갔고 예상보다 더 수월하게 지옥의 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마음이 편해져서였을까? 긴장이 풀려서였을까? 된장을 흠뻑 적신 흐물 해진 호박을 넘길 때마다 소독을 하기 위해 안감힘을 쓰고 있는 소주를 된장국이 위로하는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주야! 그 일들 일일이 다 소독할 필요 없어! 다 된장 같은 것들이니 그냥 이 호박 된장국에 속에 풀어버려! 그게 얘를 더 진국으로 만들어 줄 거야!"
그리고 어쩌면 J과장도 술을 마시기 위해 술자리에 간 게 아니라 다음날 엄마가 끓여준 해장국을 먹기 위해 마신 게 아닐까?라는 합리적 의심까지 들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자이언티의 양화대교를 들으면 몸이 움찔하고 반응한다.
“양화대교 잘 있지?”
그럼 알코올에 적신 내 영혼을 구원해 준 호박 된장국을 마시러 아니.. 먹고 싶으신 분 소리 질러!
엄마 나 배고파
가을이라 부르는 호박 된장국
1. 호박은 쪼개서 씨를 알차게 숟가락을 파면서 소리 질러~스트레스야 가라아~
2. 쌀뜨물에 된장 크게 한 스푼 살살 저어서 풀고
고춧가루 한 스푼, 다진 마늘 반 스푼, 청양고추 한 개
양파 반 개 넣고 호박이 투명하게 익을 때까지 푹 끓여 3. 대파 넣어주면 식어도 맛있는 가을 호박된장국이야
보글보글 끓여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