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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연 Oct 26. 2022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권선징악의 역기능



어렸을적 읽었던 동화책의 내용은 늘 권선징악이 대부분이었다. 동화책의 주인공들은 늘 나쁜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마지막에 반전처럼 일이 잘 풀린다. 여기까지는 참 훈훈한 결말이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나쁜 사람이 벌을 받는 과정이 문제다. 여기까지 듣고,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 게 무슨 문제냐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아직 순수한 사람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나쁜 사람에게 주어지는 벌'은 동화책에선 확실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일상 생활에서는 그 인과관계가 동화책처럼 명확하고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흥부놀부 이야기를 보면 착한 흥부는 제비가 물어온 박씨로 금은보화를 얻고, 놀부는 제비가 물어온 씨를 통해 곤란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이를 보며 통쾌한건 이미 우리가 글을 통해 흥부는 착한 사람, 놀부는 악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있기 때문에 권선징악이라는 결말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앞의 이야기를 건너뛰고 후의 결말을 먼저 들었다면, 어쩌면 놀부는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불행한 사람, 운이 좋지 않은 사람으로 비춰져 놀부를  응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타인의 인생을 전지적작가시점의 소설을 읽는 것처럼 완벽히 알수도, 또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이야기 유추해 낼 없지 않은가. 동화에선 놀부가 벌을 받고 개과천선하며 이야기가 끝나지만 우리네 인생에선 큰 일을 하나 끝냈다고 인생이 끝나지는 않으니 말이다.


뿌린대로 거둔다는 속담이 있다. 그 속담이 아마 권선징악의 시작일 것이다. 뿌린대로 거두는 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참 바람직한 일이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참 어렵다. 이는 수학의 '집합과 명제'에서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으로 생각해보면 조금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다. 뿌린대로 거두는 건 맞지만 거둔다고 모두 이전에 뿌린건 아닐 수 있다. 이는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는게 맞지만 벌을 받는다고 해서 나쁜 짓을 했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는 뜻이다. 살면서 억울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번이라도 있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SNS에 친구의 아내가 나이가 많다며 아이를 가질 수 없을거라며 친구를 조롱하던 남자는 자신의 어린 아내가 불임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고, 친구들에게 임신소식을 알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는 글에 많은 사람들이 저주의 댓글을 남겼다. '그러니까 아이를 못 갖는다', '뿌린대로 거둔다.' 이런 댓글이 대부분이었는데 그 글을 우연히 보게 된 불임부부들은 어떤 생각이 들까?시 자신이 이전에 잘못한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자책을 하진 않을까?


우리가 권선징악을 좋아하는 이유는 세상에 권선징악이라 부를 만한 일이 드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권선징악을 바라고 그것을 믿기 때문에 선의의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사람들은 나에게선 일어나지 않는 권선징악이 타인에게는 일어날거라는 이중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불행한 이유는 단지 운이 없기 때문에, 타인이 불행한 이유는 벌을 받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쩌면 권선징악이라는 말이 족쇄가 되어 나를 괴롭힌다. 불행을 말하는 것도, 내가 한 일에 성과가 나오지 않는 것도,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없는 것도, 사랑받지 못하는 것도 모두 내탓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불행한 이유를 내안에서 찾으면 더 불행해질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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