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그래, 글을 쓰다가 단어 한 개가 생각 안 나면 끝까지 생각이 안 난다니까.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근데 예전에 네가 단어 하나 찾아줬었잖아. 아니 여러 번. 그게 뭐였더라? 난 이상하게 그 단어가 낯설어. 그 단어뿐만 아니라 어떤 단어들은 마치 ‘게슈탈트 붕괴 현상’처럼 낯설다 말이야. 말로 할 때는 괜찮았던 것 같은데 글로 쓰려면 느낌이 다르더라고. 참 희한해. 거의 매일 쓰는 단어인데 사전을 찾아본다니까”
그녀가 혼자 신나서 떠드는 나를 유심히 바라본다.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게 아니었구나. 직감했다. 난 이래서 안 된다. 누가 말 한마디만 하면 신나서 혼자 떠드는 습관. 나는 점점 수다스러워지고 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고 난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미안하다고 사과해도 소용없겠지.
“그래, 맞아. 너 맨날 잊어버리는 그 단어. 그거 좀 그만 물어보고 수첩 같은데다가 좀 써놔.”
“그래야지...”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출처 네이버
한참 후에 그녀는 말했다.
“누가 내게 알맞은 단어를 찾아줬으면 좋겠어.”
글을 쓰는 작가라는 나는 난독증이 있다. 아니, 글을 읽을 때 말고 대화를 할 때도 그런 걸 보면, 그건 난독증이 아니라 공감 능력이 부족한 탓이다. 가끔 내 글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나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느꼈던 배신감을 똑같이 느끼고 있을 그녀.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나를 질책하지 않는다.
“어떤 단어가 필요한지 내게 설명해줄래? 게임을 해보자. 네가 설명을 하고 내가 열 번 만에 맞추는 거야? 그거 게임을 뭐라고 하지? 또 생각이 안 난다.”
그녀가 옅은 미소를 띠며 내게 말한다.
“스무고개? 열 번이 아니라 스무 번 일걸?”
“아, 맞다 스무고개! 스무 번이나 문제를 내면 힘드니까 열 번 만 내봐.”
“그래. 첫 번째, 자꾸 목이 말라.”
“탈수 증상인가?”
“응. 비슷해. 몸에 있는 수분이 다 빠져나간 것 같거든.”
“두 번째는?”
“두 번째는 내 폐에 물이 차는 것처럼 숨이 가빠.”
“아! 그거 마른 익사 말하는 거지?”
두 번째 고개에서 나는 그녀가 말하고 싶은 게 무언지를 알 것 같다. 그건 자신에게 필요한 건 다 사라져버리고 불필요한 것만 채워지는 것 같은 공허함일 것이다.
“세 번째는?”
그녀는 내 눈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게슈탈트 붕괴 현상,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내가 세상에 ‘괜찮다, 괜찮다.’ 그렇게 계속 말하니까 정말 괜찮은 건지 아닌지 모르겠어. 이제 그만 벗어나고 싶어.”
그녀는 이번에도 승진에서 밀려났다. 그녀의 동기들은 벌써 예전에 과장이 되었고, 부장으로 승진한 사람도 있었다. 그녀의 입사동기 중 이번에 부장으로 승진한 사람과 함께 한 회식자리에서 그녀는 회사를 곧 그만두게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은 실적이 그리 좋은 것도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은 자신의 실력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는다며, 그 이유를 정치를 잘하기 때문이라고 떠들어댄다. 그의 말은 그의 주관적인 생각일 뿐일 거다. 하지만, 정말 그의 말이 맞는 걸까봐 두렵다. 그녀는 회사에 입사한 후,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실적도 좋은 편이었지만, 이번에 후배에게 승진 기회를 빼앗긴 걸 보면 아마도 자신은 앞으로 승진이 어려울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그녀는 회사에서 늘 자기주장이 강하다며 미움을 사고 있다.
세상은 정말 실력대로 평가되지 않는 것인지, 그렇다면 퇴사 후에 다른 일을 열심히 한 대도 자신은 정말 그런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지 회사 생활을 오래 한 적이 없는 나는 잘 모르겠다. 뭐든 열심히 한 자가 잘 되는 사회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정말 열심히 글을 쓰지만, 세상의 평가는 참으로 냉혹한 것처럼, 열심히 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세상 모두를 같은 모양으로, 같은 방식으로 나열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과 비슷한 방식으로 나열되길 바란다. 그 방식에서 조금만 빗나가면 마치 혼자 소외되었거나 뒤쳐졌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게 올바른 방법인지, 어떤 게 더 행복해지는 방법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 모두 오늘을 처음 살아보는 사람들이니 말이다.
직장내에서 정치를 잘 한다는 그도 사실은 언젠가 직장내에서 언제든 소외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능력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는 일엔 반드시 그 댓가를 치르게 된다. 내 생각에, 세상을 살며 거져 얻을 수 있는 건 부모의 사랑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