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사소한_약속

by 김소연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숨어도 사랑은 늘 따라와. 지독히도 벗어나고 싶었던 그곳으로 나는 또 숨어들지. 벗어나려 애쓰면 더 깊이 빨려 들어가는 늪처럼, 벗어나려 애쓰면 더 깊이 박이는 덫처럼, 폭풍의 눈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나는 이미 네가 되어버려.


사람들은 늘 언제부터였는지 물어. 그 말이 나의 숨을 조이는 것 같았어. 언제인지 알 수 없는 그날부터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어쩌면 너를 만나기 전, 어쩌면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너를 사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어느날 나는 네 곁을 맴돌다가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졌어. 네 곁에 머무는 세찬 바람을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거든. 아니 어쩌면 증명해 보이고 싶었는지도 몰라.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사소한 약속 따위는 필요 없는 그런 관계라고.


세상에 하도 사소한 약속이 많아서, 나는 약속을 하지 않기로 했어. 언젠가 누가 그냥 흘려버린 단어하나에 상처를 받은 적이 많거든. 나는 아주 소심한 사람이었고, 곧장 숨을 곳을 찾았어. 가장 숨기 쉬운 곳이 어딘 줄 알아? 바로 폭풍의 눈이야. 누군가에게 쫓길 때 숨을 곳은 한적한 숲길이 아니라 사람이 많은 번화가이지. 그 속에 숨으면 수많은 눈이 있지만, 나를 보는 사람은 없거든.


나는 너의 주변을 맴도는 다른 사람과는 달라. 나는 사람이 많은 번화가에서도 너를 알아볼 수 있거든. 내가 그 수많은 눈 중에 하나로 남는 것이 네게 안정감을 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저 한적한 숲길을 너와 함께 걷는 게 더 좋았으니까. 우리는 서로의 폭풍의 눈 속으로 들어가 잠시 행복했을까. 하지만, 너무 잘 보이는 서로에게 질려가고 있었는지도 몰라. 폭풍의 눈은 너무나 고요해서 숨소리하나, 트림소리 하나, 어느 하나 숨겨지지 않는 지옥에 살게 되었는지도. 그저 옆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행복하기엔 이미 늦을 만큼 늦었지. 그래서 우리는 조금 다른 관계가 되기로 한 거야. 서로의 폭풍의 눈을 벗어나고, 거센 폭풍을 벗어나 이젠 자유로워졌어. 아주 사소한 약속 같은 건 하지 않는 그런 관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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