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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연 Sep 06. 2021

부모 교육

지금 마침 슬럼프가 왔거든요



수녀님은 보자기에 쌓여있는 물건을 들고 오셨다. 첫영성체 아이들의 부모 교육 날이다. 수녀님은 둥그렇게 바닥에 자리 잡은 엄마들 가운데의 작은 탁자 위에 물건을 두고 보자기를 치웠다.

“이 물건이 어떻게 보이는지 제가 지목하는 분은 이 물건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보이는 대로 설명해주세요.”





 옆쪽에 앉아있는 나도 그 물건이 액자인걸 알겠다. 하지만, 수녀님의 말대로 그 물건이 보이는 모양을 잘 살펴보았다. 뒤편에 앉은 이에게 물었다.

“갈색 나무 같아요. 직사각형이구요.”

옆쪽에 앉은 이는 ‘밤색의 길쭉한 막대기’ 같다고 말했다.

앞쪽에 있는 이는

“이건 액자예요. 밤색 트레이 안에 예쁜 풍경 그림이 있네요.”

 관찰력과 표현력을 알아보기 위한 질문은 아니었다.

“이 액자라는 하나의 물체를 우리는 왜 이렇게 볼까요? 왜 모두 다른 모습으로 보는 걸까요?”


 그 하나의 질문만으로 충분했다. 더 이상의 추가 설명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었다. 각자 다른, 부부의 관계라든지, 자주 다투는 이웃과의 관계, 혹은 아이와의 기싸움에서 부모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상대를 보이는 단면으로 바라보지 말고 그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액자라는 건, 우리가 전체를 보지 않아도 경험상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문제라면, 우리는 각자 다른 위치에서 다른 걸 보게 된다. 우리의 눈이 그 물체를 빠르게 스캔하거나 360도로 돌아가는 카메라가 없다면 말이다. 우리의 관점은 그렇다. 다양한 관점으로 상황을 바라보는 훈련을 했거나, 세상의 거의 모든 일을 경험해봤다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어떤 단편적인 상황으로는 실체를 파악하기 힘들다. 그래서 보이는 대로 편견을 가진다.


 우리나라의 언어는 참 어렵기로 유명하다. 덕분에 여러 가지 표현이 가능하며 사람의 마음을 더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언어라고 생각한다. 가끔 지방에 있는 친구나 제주도 방언 같은 말을 이해하기 힘들지만, 비단 그런 단어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이를테면 ‘아 다르고 어 다르다’라는 우리나라 속담처럼 어떤 사람의 심리를 완벽히 이해하기 힘들어서 우리는 서로서로 오해가 쌓이게 된다. 서로 싸우면서 ‘내가 더 억울하다’ 말하는 사람들처럼, 이해하기 힘든 문제에 부딪혔을 때, 우리는 그걸 객관적으로 해결하기 보다는 감정적적인 상태가 된다.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혼을 생각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나와 지방에서 태어나 지방에서 자란 남편과 나는 너무 달랐다. 물론 지역적 특색이 아니라도 다른 점이 너무 많았다. 공무원이었던 부유했던 부모님과 농사짓는 가난한 부모님의 교육 철학은 너무 달랐다. 말투, 식성까지 너무 다른 부부는 이혼을 결심했다. 결혼 전 집에서 보던 아버지와 나의 남편은 너무 달랐다. 엄마밖에 모르던 아버지, 엄마의 명령에 의해 움직이던 아버지는 우리 집에 없었다. 그는 또 너무 깔끔한 성격이어서 아이가 어지른 장난감하나도 거슬려했다. 어떻게 시골에서 태어나 자랐는지 참 의아한 상황이었다. 빵과 국수를 좋아하는 나와, 꼭 밥을 먹어야하는 그는 정말 함께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싸움의 원인은 대부분 서로를 길들이기 위한 방편이었다. 꼬박 3년을 싸우고도 해결되지 않았다면 방법은 두 가지다. 헤어지거나 포기하거나. 우리는 각자 다름을 인정하기로 하면서 싸움이 줄어들었다. ‘원래 넌 그런 사람이야’라는 비난대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라고 마음을 비우면 된다. 조금만 물러나면 되는데 그걸 지는 거라 생각하는 게 언제나 문제였다. 사실 져도 별로 상관없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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