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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연 Sep 08. 2021

행운의 자격

지금 마침 슬럼프가 왔거든요



 “나 이제 공부 안 할 거야.”

 고등학생이 된 후 첫 시험을 보고 나서 그녀는 내게 파격 선언을 했다. 너무 의아한 일이었다. 초등학생 때 꿈이 외교관에서 대학교수, 중학교 때 언론인이 꿈이었던 아이였다. 시험 한번 망친다고 네 인생이 변하는 건 아니다. 앞으로 시험을 더 잘 보면 된다고 꼰대처럼 설득이 이어졌다. 한숨을 푹 하고 쉬는 걸 보니 그녀는 지금이 사춘기인가 보다. 흔히 중학생 시절에 친구들이 하는 반항도 하지 않던 아이였는데,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사춘기가 오다니 믿기지 않았다.





 그녀는 중학교 입학, 졸업을 전교 1등을 한 수재였다. 학교도 또래 아이들보다 한 살 먼저 입학한 아이였는데 말이다. 아니 수재라고 생각했던 건 내 착각이었다. 그녀는 배치고사를 보는 마지막 세대였고, 그 배치고사를 잘 보기 위해서 초등 졸업을 앞두고 문제집을 다섯 권이나 풀며, 200여 명이 넘는 학생 중 1등으로 학교에서 선서를 하고 입학을 했다. 중학생 시절 내내 밤을 세워 공부해서 졸업할 때 교육감 상까지 거머쥐었는데, 시험 평균 점수가 99점대였었다. 그런 아이가 학업을 포기할 만한 이유가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뭘 해도 될 것 같던 아이는 고등학교 진학 후에 완전히 달라졌다. 시험 보기 전부터 자신이 없다며 통 공부를 하지 않고서 겨우 벼락치기로 공부를 하니 성적이 잘 나올 리 없었다. 중학생 때보다 더 공부시간이 짧았었는데, 나는 그녀가 그 당시에 슬럼프에 빠졌을 거라고, 곧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고2가 되어서야 내게 자세히 말해준 내용에 난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중학교 때 성적의 비밀은 실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순전히 노력의 결과였으며, 고등학교 공부는 아무리 봐도 노력으론 성적을 낼 수 없다며 자신을 포기해주길 바란다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좌절할 만한 성적은 아니었는데, 왠지 그녀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녀는 1등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스스로 1등이 아니면 소용없다고 생각 한 듯하다. 열심히 공부해도 성적이 나오지 않을까봐 그녀는 1학년 내내 공부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말 아이에게 공부를 강요한 엄마였다면, 죄책감에서 벗어나질 못했으리라. 다행히 난, 그녀에게 공부 말고 다른 잘 할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고 말했다. 세상 모든 이가 같은 일을 잘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라고 쉽게 말했는데, 그녀는 그 말을 듣고, 그날 밤, 밤새도록 울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학창시절에 공부를 한 적도, 하고 싶지도 않았던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내가 잘못한 게 뭐란 말인가?  




 


 요즘, 나는 예전의 그녀처럼 사춘기가 온 듯하다. 그녀 다행히 학교생활에 안정을 찾으며, 이제 내가 열심히 방황 중이다. 열심히 해도 안 될 것 같은 기분을 이제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제 알 것 같다. 슬럼프라는 건 정말 열심히 한 자에게 주어지는 거라고.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열심히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요즘, 나의 전성기이자 슬럼프라고.

 “엄마 이제 글 쓰는 거 그만둘 거야.”

 “응~ 그래!”

 이렇게 쉽게 말하는 딸이 밉다. 하지만, 서운하다는 표현은  못하겠다. 그녀도 아마 내게 그런 기분을 느꼈을 거라고. 그때, 공부 하지 말라고 말했을 때 말이다.


 자신이 1등으로 입학, 졸업을 한건 운이 좋아서라고 말하는 딸에게 말해주고 싶다. 행운은 노력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 같은 거라고. 그래야, 내게도 행운이 올 것 같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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