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눈
눈
눈 오는 날을 좋아한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고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다. 역설적이게도 겨울의 혹독한 추위는 너무 싫어하지만 눈은 마냥 좋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눈이 내리면 포근해지는 기분이다. 군대에 있을 때 남들이 눈을 일컬어 ‘하늘에서 내리는 쓰레기’라고 불렀는데 나는 그때도 눈이 좋았고 새벽에 기상해서 제설 작업을 할 때도 짜증 내지 않고 오히려 간부들 몰래 눈싸움을 하며 놀았다.
그리고 나는 눈이 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캐럴을 찾아 듣는다. 사실 눈이 내리기도 전에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면 언제 눈이 내릴까 기대하며 캐럴을 듣기 시작한다. 마침내 눈이 내리면 밖에 나가서 이어폰을 귀에 꽂고 흘러나오는 캐럴을 듣는다. 그리고는 눈을 맞으며 목적지 없이 그냥 계속 걷는다.
또 첫눈이 오는 날에는 항상 크리스마스 영화를 찾아본다. 몇 년 전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할 때면 러브 액츄얼리라는 영화를 매 해 찾아봤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몇 번 겪어보진 못했지만 눈을 떠올리면 항상 크리스마스가 같이 떠오른다. 어쩌면 눈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를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당일 보다도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며 설레는 시간들이 좋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몽글몽글한 감정이 피어오른다. 막상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기대했던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아니라서 실망했던 적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워킹홀리데이로 떠나온 캐나다. 겨울이 길고 눈이 많이 오기로 유명한 곳이다. 특히 내가 있는 밴프라는 지역은 겨울이 되면 영하 30도까지 떨어지고 9월에 눈이 내리기 시작해서 6월까지도 올 수 있는 곳이다. 실제로 내가 겪었던 6월과 9월에 눈이 왔었다. 덕분에 최근 한국에서 자주 보기 힘들었던 눈을 캐나다에서 원 없이 봤다. 눈 때문에 밴프라는 지역을 선택했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추위를 워낙 싫어하기 때문에 영하 30도에서 버틸 자신이 없어서 밴쿠버 같이 따뜻한 지역을 갈까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사진으로 본 눈이 쌓인 산타마을 같은 분위기를 포기할 수 없었고 실제로 봤을 때도 사진과 똑같은 느낌이라서 이 곳에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결과적으로 아주 잘한 선택이 되었고 내 인생 중 이런 곳에서 다시 살아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꿈만 같던 곳이었다. 여기서 지냈던 순간들과 이때의 감정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이어폰과 카메라를 챙겨서 어김없이 눈을 맞으러 밖으로 나간다. 눈을 맞으며 걷다가 카페에 들어와 따뜻한 커피로 몸을 녹이며 창 밖에 눈이 내리는 모습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본다. 말로 형언할 순 없지만 그 순간이 정말 좋다. 그때가 나에게 항상 따라다니는 시답잖은 고민들과 생각을 잠시 멈출 수 있는 순간이다. 정말 춥고 외로웠던 순간들도 있었지만 반대로 정말 마음을 다해 행복할 수 있던 시간들도 많았다.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니 생각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