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평대생활> 30일째
뒤척이다 겨우 든 잠인데 새벽에도 몇 차례나 눈을 떴다. 일찍 서둘러야 예약된 아침 비행기를 탈 수 있다. 내려두었던 긴장과 염려 같은 것들이 다시 고개를 드는 듯했다. 휴가가 끝이 나고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안타까운 신호였다. 달달한 꿈에서 깨는 순간이었다. 아니, 정말로 꿈이었을까.
새벽에 평대 해변으로 나갔다. 마지막 산책이었다. 늘 그랬듯 바람이 불었고, 바람은 친근했다. 제주에서 바람이 없었던 적이 거의 없었다. 아주 드물게 바람이 없다 싶은 날에도 그 존재감은 선명했다. 동쪽 바다에 붉은 기운은 조금 남았지만 짙은 구름에 가려서 해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평대에 와서 일출을 한 번도 못 봤다. 일출을 보려 일부러 일찍 일어날 생각이 없었다. 사진기자인 내게 일출은 대체로 일이었다. 지난 연말만 해도 며칠 잠을 설쳐가며 일출 사진을 찍었었다. 내게 ‘일출=일’이었던 거다.
바닷가를 거닐며 정든 공간에 작별을 고했다. 지난 한 달을 신속히 되짚었다. 다채로운 경험들이 있을 텐데 머릿속에는 도착하던 날의 또렷한 장면과 돌아가야 하는 날이 바로 오늘이라는 사실만 또렷해졌다. 누군가 한 달을 쓰윽 걷어가 버린 기분이다. 낱말들이 날아들더니, 휴가를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나는 한 달 전 제주에 왔고, 오늘 제주를 떠난다.” 날 밝아오는 바닷가에서 좀 쓸쓸해졌다.
당장 오후에 민박집을 보러 온다는 이를 위해 집을 깨끗이 치웠다. 모르는 사람에게 욕먹고 싶진 않았다. 쌀, 라면, 휴지, 커피, 소주 등을 잘 챙겨서 넣어두었다. 들어올 사람이 막 떠난 사람이 남긴 것에 고마워할 여지를 남겨두고 싶었다. 살던 자의 여운을 그런 식으로 남겼던 것이다. 한달살이가 크지 않은 캐리어와 백팩에 다 들어갔다. 민박집을 나서서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골목은 매일 오갔던 길인데도 낯설어지는 듯했다. 마치 두리번거리며 걸어 들어오던 첫날처럼 말이다.
민박집과 집 앞의 팽나무, 골목을 따라 늘어선 집들과 당근밭을 하나하나 새겨 넣으려 했다. 그럴수록 신기루처럼 더 아득해졌다. 휴가가 신기루였던가, 어쩌면 전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혼자 껄껄 거렸다. 머물던 곳을 떠나며 하염없이 뒤 돌아본 적이 있었던가. 돌아보지 말고 가자고 다그쳤지만, 뒤로 돌아가는 고개를 붙들 수는 없었다. 멀어지는 골목을 향해 셔터를 딱 한 번 눌렀다. 나를 붙드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떠나는 사람은 몰라도, 보내는 사람은 손 흔들면서 울어.” 전날 석희형님이 나와 작별 악수를 나누던 중에 했던 말이 버스 안에서 메아리를 쳤다. 너털웃음을 지으며 꼭 농담처럼 툭 던졌는데 그게 진심이었다고 느꼈다. 잡았던 그의 거칠고 투박한 손만큼이나 정직한 말이었을 것이다. 난 다시 오겠다고 말했고, 그는 “온다는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막상 잘 오기 힘들지. 다시 오는데 3년은 더 걸리더라”하고 아쉬움을 담아 답했다. 저녁 자리에 동석했던 목수 형님이 한마디 거들었다. “정들면 떠나는 육지사람한테 여기 사람들이 정을 잘 안 주는 이유예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창밖으로 제주섬이 멀어져 가는 동안 느슨하게 풀어졌던 마음이 조금 조여지는 것 같다. 몸뚱어리가 ‘육지사람’ 모드로 빠르게 전환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분명하게 느끼는 건, 나는 한 달 전의 내가 아니라는 것과 아주 조금은 나은 사람이 된 것 같다는 것이다. 좌석 등받이에 기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그래서 나와 친해져서 돌아가는가?"라고. 내 대답은 망설임 없이 "그렇다"였다.
평대의 시간은 행복했다. 이런 시간이 내게 다시 올 수 있을까.
아… 내일은 출근이다. /yaj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