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계단> 중에서
삶과 죽음을 포괄하는 내면세계의 유일한 관찰자. 그것이 하나의 의식으로서의 자아의 실체다. 우리는 단 한순간도 자아의 외부로 나가본 적이 없다. 그건 불가능하다. 현실, 꿈, 사후의 현상은 다만 나의 의식에 의해 구성된 산물일 뿐이다. 세계란 내 마음의 반영이다. 그래서 어쩌면 모든 '나'라는 존재는 태생적으로 자폐아일지 모른다. 우리는 세계의 실체와 대면해 본 적이 없고, 타자의 본질에 닿아본 적이 없다. 우리가 궁극에 이르러 하나의 의식으로 수렴할 때까지, 모든 나란 존재는 그렇게 홀로 무한한 시간 동안 세상을 여행할 것이다.
<열한 계단> 중에서
지나치게 '자신'에게 시선이 몰려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세상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고 할 때마다 내 안의 목소리가 더 크게 울렸다. 사건이든 타인이든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연하리만큼 시선은 내 안을 향했다. 생각의 탄성은 늘 방향이 일정했다. 결국 나에 대해 더 생각하고 마는 일이었다.
어차피 하루 반나절을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웃고 울었던 이들도 집으로 돌아갈 때는 그 많은 이야기 속에 특히 더 머물렀던 자신을 떠 올린다. 타인의 행복과 아픔 속에서 내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경험했던 행복과 아픔 딱 그 수준이다. 그 만큼의 이해를 나눠가졌다. 나는 네가 될 수도, 너는 내가 될 수도 없었다. 결국 그 만큼의 거리에 만족하고 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