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얄리 Jul 01. 2020

덜 아픈 사람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중에서

진정으로 비정한 일은, 네가 아픈 만큼 나도 아프다고, 그러니 누가 더 아프고 덜 아픈지를 따지지 말자고 말하는 일일 것이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 덜 아픈 사람이다. 지배하는 사랑과 미성숙한 사랑의 공통점 중 하나는 저울을 사용할 줄 모르거나 사용하려 하지 않으려 하는 데 있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중에서 



타인의 아픔 앞에서 어떻게 그 사람을 위로해야 하는지 몰라 쩔쩔 메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쩔쩔 메며 던진 위로는 때때로 의도치 않게 이렇게 들린다. 


"세상 사람들 누구나 자기만의 아픔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말이 절망적인 선언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너만 아픈 게 아니니 너무 징징대지 말라거나, 아픔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란 아무도 없고 너도 마찬가지 일 뿐이다라는 말로 들릴 때 말이다. 고통으로부터 탈출은 불가능해 보인다. 


"네가 가진 아픔보다 더 한 아픔을 가진 사람도 많다"는 말이 자존감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무기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더 큰 고통도 감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고작 이 작은 고통에도 소란을 떨 만큼 나약한 사람인가 싶어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울음을 주먹으로 막아야 할 것만 같을 때 말이다. 울면 안 된다. 


"곧 괜찮아질 거다"는 말이 어두운 골방에 쳐 박힌 듯한 소외감을 느끼게 만들 때가 있다. 언젠가 골방의 문이 저절로 열릴 테니 그때까지 어둠을 감내하며 견뎌보라고 등 떠밀리는 것 같고, 곧 괜찮은 날이 언제일지 막막해하는 것이 마치 빛을 믿지 않은 항거자가 되는 것 같을 때 말이다. 믿기지 않는다. 




나는 이런 위로가 좋았다. 


"내가 너의 아픔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속이라도 시원하게 털어놔 봐"라는 말, 말 못 할 고민이 말로 나올 때 압축된 공기가 빠져나온 듯 고통이 주는 탠션이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네가 원할 때 너의 곁에 있으려고 노력할게"라는 말, 그 노력이 항상 통하지는 않을지라도 그런 마음을 가져주는 사람이 세상에 하나만이라도 있다면, 세상에서 소외된 채 외톨이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은 줄어들 수 있었다. 


말이 없는 공감, 이를 테면 다가와 안아주거나, 손을 잡아주거나, 내 감정 안으로 들어와 함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마주하는 것이 위로가 될 때가 있었다. 때때로는 위로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 메는 그 모습 자체가 위로일 때도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입은 날은 

각자의 상처의 근원에 있는 두려움을 보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내가 상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상대가 나에게 지쳐 나를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내가 상대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대상이 될 수 없게 된 것 같은 두려움. 


그런 날은 "네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니까"라고 단정하고 자신을 상처로부터 보호할 장막을 치는 것보다는 내 안의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꺼내 놓는 것이 나았다. 어쩌면 서로 같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설령 그것이 현실이 되더라도 왜 그렇게 된 것인지는 알고 갈 수 있는 일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슬픔은 무엇으로 인해 오는지 보아야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름다운 이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