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하지 그랬어.

무늬만 사랑인 것은 가고

by 얄리
나는 로맨스가 싫어


라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내가 싫어한 것은 '로맨스'가 아니라, 타인의 로맨스를 보면서 '지난날의 내 사랑을 돌이켜 보는 것'이었다. 진심으로 누군가에게 홀딱 반해 달뜬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애태우던 기억 따위가 내게 있을 리가 없었다. 사랑을 하는 방식에 있어서 '내가 끌리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과 '나에게 끌리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으로 나눈다면, 나의 사랑은 항상 후자였다. 그러니 애를 태우는 건 언제가 내가 아니라 너여야 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역시 나를 좋아하게 될까?' 하며 마음 졸이고 아파하고 실망하는 감정에 휩싸이는 건 원하지 않았기에, 빗나갈 가능성이 적은 선택지를 원했다.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는 몰라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보다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나는 게 더 낫더라'는 말도 유효했던 것 같다. 선배들의 충고는 새겨 들을만 한 거였다.


일단 나를 좋아해 봐.
나도 너를 좋아할진 생각해 볼께


상대가 먼저 나를 좋아해야 관계가 성립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상대가 내게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예민하게 읽어내는 감각을 키웠다. 눈빛은, 말은, 손길은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나를 좋아하고 있는지 아니면 나 말고 저쪽에 앉은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는지 답은 금방 나왔다. 알아차린 후에 내가 하는 일은 기다리는 것 뿐. 미끼를 드리운 낚시꾼처럼 "이때쯤이면 할 때가 되었는데" 싶을 때 고백이 있었다. 사랑, 어렵지 않았다.





넌 내게 과분하다는 말,
그걸로 난 충분했다


사랑을 한다면 '누가봐도 부러워 할 만한 연인'이 되고 싶었다. 내가 너의 고백에 응한 것은 너의 생애 최고의 행운이어야 했다.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현실적인 고민보다는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막연한 꿈만 꾸며 매일을 소모하는 너의 연인이었다. 내 친구들과 마주치는 날이면 소개를 하기도 전에 어디론가 숨어버리는 너의 연인이었다. 기념일이 되어도 무엇 하나 준비해 줄 돈이 없어 만나는 시간을 자꾸 미루는 너의 연인이었다. 자신의 앞길을 성실하게 준비해 나가는 동창들의 시샘하는 눈초리에 우쭐해 하는 너의 연인이었다. 너와 나의 무게를 재는 저울은 항상 내게 더 기울어져 있었다. 과분하다는 건 분수에 넘친다는 말이다. 넘친다는 것은 충분히 찬 것을 의미했다. 부족하지 않다는 말이기도 했다.


네가 어떻게 감히?


그랬던 네가 친구와 시간을 보내느라 술을 떡이 되도록 마시고 내 전화를 받지 않자, 화가 나 너에게 핸드폰을 집어 던졌다. 친구 커플과 함께 한 자리에서 친구의 연인을 흘끔거리자, 지하철로 집까지 데려다 주는 너를 옆에 두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성통곡 했다. 아직 자기 하나도 건사할 방법도 찾지 못한 너에게 "우리의 미래는 뭐냐?"며 답이 없는 질문들을 쏟아내고는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너는 죄인이 되어 갔다. 네가 잘못한 일이 있을 때도 그랬고 내가 잘못한 일이 있을 때도 그랬다. 고백에 대한 응답을 받은 댓가로, 언제나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해야 하는 건 너였다.


너무 피곤해서 자야겠어


언제부터인가 딱히 서로에게 할 말을 찾지 못하던 우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발걸음을 멈추게 한 건 통화 끝에 네가 한 말 때문이었다. 하. 허튼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잠이 쏟아져서 한 말이 아니었다는 걸 나도 알고 너도 알았다. '내가 좋다'는 말 한마디로 너무 쉽게 시작을 하고, 나의 무엇이 좋았는지 알 수 없어 모든 게 좋은 연인이기 위해 애를 쓰며, 힘겹게 노력한 만큼 '포기하지 않고 사랑을 이루어 냈다'는 마침표를 찍고 말겠다는 오기로 너를 도망칠 수 없는 통로로 밀어 넣는 순간 나도 그곳에 갇혀 버렸다. 보고 싶은 것만 보던 7년의 연애가 저무는 밤.


그래, 잘 자.


내 사랑이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이루어질지 아닐지 초조함에 떨었던 시점이라는 게 원래부터 없었으니까. 나에게 빠져 있는 너의 눈빛이, 다정한 말이, 떨리는 손길이 행복해하는 증거라고 생각했지만 나의 눈빛이 나의 말투가 나의 손길이 너와 같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불분명한 나의 로맨스는 끝도 흐렸다. 헤어지자라는 말 한마디 없이 아주 오래 휴면이었다.


나는 정말
너를 사랑했던 걸까?




하루 하루가 갑갑했던 나에게 너는 '일탈'이었다. 갑작스럽게 불쑥 수업을 듣고 있는 내게 문자를 보내 학교 밖으로 불러내고는 오토바이 뒷 자리에 태우고 시내를 질주했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가게로 친구들을 잔뜩 데리고 와서 일하는 동안 계속 장난스런 몸짓으로 나를 웃게 만들었다. 늦은 밤 전화를 걸어 한 시간이 넘게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주며 나의 하루를 묻곤 했다. 예측할 수 없는 변수, 예측할 것도 없는 뻔한 생활을 잊게 만드는 숨구멍. 어쩌면, 너라면 내가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할 암울한 미래를 거부할 수 있게 만들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함께였다면
더 많이 서로를 힘들게 했을 거야


한동안의 휴면을 깨고 이미 연인이라는 이름이 무색해진 후 다시 만난 너와 나는 이 말에 아무런 반박을 하지 않았다. 현실에 갇혀 살았던, 현실을 피해 살았던 미래가 암담하기는 너와 내가 다르지 않았다. 나에게 네가 일탈이었듯이 너에게 나 역시도 일탈이었다. 일탈로 현실을 버틴다는 것은 유한한 것이다. 상대에 의해 미래가 바뀌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함께 한다는 것은 위태로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각자가 자기 스스로 미래를 바꾸어낼 수 있는 두 사람이 함께 했어야 했다. 둘 사이에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 속에서 자신과 상대를 모두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여력이 있어야 기댈 수도 품을 수도 있는 거였다.


여기서 내려줘


집 근처에 다다를 무렵 우리가 항상 만나던 공원 주차장 부근에서 우리는 헤어졌다. 아니 함께 탈출했다. 사랑은 주는 것이거나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었다. 시집을 가거나 장가를 가는 게 아니라 결혼을 하는 것처럼.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성취하고 마는 그런 것도 아니었다.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 어느 쪽이 더 많이 사랑했는지를 재는 저울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서로의 오기로 서로의 짐이 되는 것을 묵고해야 하는 환타지는 더더욱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한건 나의 일탈이던 너로 인해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거다. 나의 미래는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이었다. 미래에 내 앞에 서게 되는 사람이 누가 되든 나는 내 심장의 박동을 느낄 것이다. 내게 물을 것이다.


사랑하나요?




차라리, 사랑을 하지 그랬어



요정이 마련해 준 옷으로 한껏 치장을 한 채 파티장으로 달려가 생전 처음 본 왕자와 춤을 추고, 그의 손에 들어갈 만한 이동경로에 유리구두를 떨구고는 운명적으로 재회하여 결혼에 꼴인한 신데렐라가 행복하게 잘 살았더라는 것은 아마도 루머일 것이다. 그날 밤 그녀를 찾아온 요정은 '어떻게든 힘겹고 버거운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했던 신데렐라의 욕망'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욕망하는 것만큼 그녀는 열정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마치 자신의 욕망을 들켜버리기 싫어하는 것처럼 그녀는 벗어나고 싶은 현실 속에 웅크리고 앉아 바라본다. 혹시라도 우연한 기회에 왕자와 재회한다면 그것은 운명일 것이다. 거역하기 어려운 운명에 의한 해피엔딩, 그녀의 욕망을 가려줄 수 있는 아름다운 포장지. 그런 그녀가 정말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었을까?


아주 우연한 기회에 왕자를 보게 되고 혼자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쿵쾅대는 가슴의 진동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많은 밤들을 가졌어야 했다.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 어디로 시선을 둘 지 몰라 당황하고 손을 잡은 날은 온종일 그의 온기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날들이 있어야 했다. 비가 오면 젖을까, 눈이 오면 미끄러질까, 세상의 평범한 모든 날에도 걱정이 앞서는 일도 생겨났어야 했다.


그 모든 순간에 사랑으로 내가 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