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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 기 홍 May 04. 2020

노년의 내게 보내는 편지.

길을 가는 나에게....

창문을 여니 밤새 기대어 졸았던 아침이 넘어지듯 방 안으로 들어옵니다.


지난밤 드세었던 바람에 조금은 지쳤을 법도 한데, 생기 발랄한 삽상한 얼굴로 내 옆에 자리합니다.

무릎 위의 강아지는 익숙해진 아침의 체향에 제 몸을 온전히 맞긴 채 끊긴  꿈을 다시 이을 태세입니다.

살짝 허리를 돌려 뒤편의 책장에 눈길을 주니, 한쪽 구석에 켜켜이 쌓인 먼지를 이고 있는 대 여섯 권의

수첩이 눈에 들어옵니다. 사실 모양이 책장이지 결국은 잡동사니를 한 아름 안고 있는 공간이 된 지 오래입니다.


"2009년 9월 8일"이라고 휘갈겨 쓴 글씨에 이런저런 상황을 요약한 짤막한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 그래 이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라고 되뇌며 살펴보건대 딱히 연결되는 게 없습니다.

정말 형편없이 모자란 기억력입니다.

다른 페이지를 들추다 보니 편지 한 장이 툭 하고 빛바랜 색으로 나타납니다.

"2010년 1월 1일 새벽 12시 37분" 수신인 나의 사랑하는 딸. 개봉일자 20세가 넘은 생일.이라고 나름 곱게 접은 봉투 없는 편지지에 써 놓은 편지였습니다.

두 딸을 가진 내가 "딸"이라고만 표기한 것은, 아마도 큰아이가 먼저 성인이 되는 시점을 염두에 두었나 봅니다. 정작 수신인은 딸인데 혼자만 볼 수없어, 큰아이의 생일에 즈음하여 가족 모두가 둘러앉아 읽어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미 읽어본 편지였죠. 작은 아이마저 성인이 된 지 이미 몇 년이 지났으니까요.

그때 다 같이 읽어보고, 내가 어디다 보관한다는 것이 이 수첩에 넣었나 봅니다.

개략적인 내용은 우리가 어디에 살고, 어떤 모습을 하고 있고, 현재의 가정경제 상황과 건강문제. 그리고 아이들의 특징적인 모습과 좋아하는 것들. 심지어 TV 프로그램 이름과 내용 등, 소소하면서도 일상적인 내용들을 시작으로, 아빠와 함께 보내는 시간부터 놀이 등을 말하고, 향후 어른이 되어가는 아이들에게 바라는 것들과 아빠의 다짐들을 적어놓은 A4용지 2장 분량의 편지였습니다.

그것을 본 아이들의 모습에서 약간의 감동이 느껴졌던 것은, 분명 착각은 아니라고 믿고 싶습니다.

 내 안에 너무 깊이 박혀있어 꺼내기 조차 힘든 것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은 나와 함께한 것들이 분명한데, 기억의 방에서 머물지 못합니다.

비록 사람은 망각에 의해서 자유로워진다는 역설적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지만, 아케론 강을 건너고, 코키투스 강을 건너면서도, 때론 레테의 강물을 마시지 않길 바라는 마음도 있을 거라면 약간 오버일까요?

문득 그런 생각을 합니다. 망각 역시 나의 삶을 완성시켜주는 편린들이 담겨있는 커다란 주머니가 아닐까 하는....  

그래서 오늘부터 내게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편지라.... 조금 진부한 말이죠?

하지만 그래도 써야겠습니다.


크로키처럼 빠르지도 급하게도 아닌, 정밀묘사의 수준처럼 언제 어느 때 보아도 그 사실을 회상할 수 있는 편지를 써야겠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월이 흐를수록 생각의 잡념들이 나날이 번져갈 텐데, 잊히는 것들이 많아지고, 지워지는 것들이 많아지면, 

가슴이 너무 허무해질 것 같아 색인표를 붙여가며 정리를 해야겠습니다.

쌓이고, 쌓이고 또 쌓여만 가서, 들춰보다 지쳐 잊히는 일들이 없도록, 메모가 아닌 편지를 써야겠습니다.

  



' 너희들 포켓 리스트를 한번 써 볼래? '아이들이 초등학생 일 때, 두 아이를 앉혀놓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버킷리스트"라는 주제로 저마다 생각해보고, 때론 작성하면서 노년을 맞이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가며

고민하는 중년들에게, 하나의 인생 설계처럼 유행하던 때였습니다.


그것에 착안해 아이들에겐 좀 더 작은 규모의 뉘앙스인 "포켓 리스트"란 생경한 단어를 들이밀며 권유한 적이 있습니다. 아울러 또 다른 지출 형태인 문구점에서 회원 카드를 발급받아, 필요한 것을 스스로 생각하고, 지출하는 경제관념과 구매로 인해 쌓인 포인트를 사용하는 방법의, 

작은 신용카드의 사용법을 꽤 오랜 기간 사용하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론 반쪽의 성공이었지만 아이들에겐 큰 경험이 되었을 겁니다. 그 영향일까요? 어느덧 성인으로 성큼 변한 두 딸은,  졸업 후 첫 직장으로 증권사와 은행인 금융업을 택했고,  현재도 근무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또다시 제의한 "포켓 리스트"에 관해 아이들은 흥미를 보였고, 나름 열심히 생각하고 써 가면서, 그것을 이뤄 가는 방법에 대해 제법 심각하게 고민하고 실천해 나간 적이 있었지요.



당시의 일은 내용이 아련해서 기억나질 않지만, 결과적으론 아이들 스스로의 다짐과 행동양식이, 메모를 넘어선 본인 수신의 편지로,

오랜 시간에 걸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이 글과 감성, 감정들 역시 훗날 펼쳐보면 내게로 보내지는 조금은 다른 형태의 편지가 되진 않을까요?


글이 작성된 때마다 다루는 주제를 살펴보면

주된 관심사를 알 수 있고, 겪고 있는 상황도 유추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건강상태도 가늠해 볼 수 있을 테고. 물론 정밀묘사처럼, 근접된 기억을 소환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냥 보조적인 기억 소환의  플랫폼 역할은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 보겠습니다.


편지의 형태와 구성에 관해선 기존 정형화(?)된 틀을 꼭 따를 필요는 없을 겁니다. 간략, 요약된 메모의 성격에서 조금만 범위를 확대하고 디테일을

심어 놓는다면 구구절절 몇 장씩 넘어가는 편지가 아니라, 하나의 묶음으로 전체를 엮어 낸다면

자연스레 삶의 골격을 들여다볼 수 있는 나만의 수필집 같은 편지 모음이 될 테니 말이죠.



내가 노년의 나, 그대에게.

오늘의 볕은 유난히 따스합니다.

그곳의 그대는 어떠신지요.

건강은 괜찮겠지요?

그대와 조우하기에는 많은 날들이 남았을 텐,

벌써 마음은 그대를 찾아갑니다.


세월이 오래될수록,

젊음은 차츰 퇴색되겠지만.

언제고 만날 그대를 생각하면,

흩어져 메말라가는 젊음도 그리 슬프지  않습니다.

궁싯거리던 시간을 재촉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대의 가야 할 길 위에선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언제고 혼곤한 잠에서 깨어나면,

오래된 나 인, 그대에게 바랍니다.

윤슬 한 미소와 해탈한 이야기로,

오랜 세월 그대가 되기 위해 애써온 나를

밝은 미소로 다정하게 맞아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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