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도 그럴 것이 대학교 2학년 때 만나서 연애 9년 그리고 결혼 후 23년 도합 32년을 살았으니 모르면 간첩이다.
남편은 돼지고기, 오리고기를 안 좋아한다. 소고기도 한우만 먹고 생선회, 매운탕, 간장게장 등 바다가 고향인 음식들은 비리다고 냄새 맡기도 싫어한다. 그뿐인가 곱창, 닭똥집은 '부위?'가 기분 나빠서 싫다 하고, 시금치는 씹히는 맛이 별로란다. 야채는 상추보다 깻잎과 쑥갓을 즐긴다. 미나리와 고구마순 김치도 좋아한다. 김치는 막 담근 생김치를 좋아하고 새큼해지기 시작하면 찌개로만 먹는다.
볶음밥 비빔밥도 싫어한다. 먹을 때 품위가 없고 지저분해 보인단다. 미역국은 아주 좋아하는데 막 끓여내놨을 때 한 번만 먹고 재탕한 것은 손도 안 댄다. 재탕한 미역국은 비릿한 맛이 느껴진단다.
과일은 별로 안 좋아한다. 먹더라도 딱딱한 복숭아와 수박을 좋아한다. 먹어봤자 한두 개가 끝이다. 포도 자두 사과 등 신맛이 어우러진 과일은 다른 사람이 먹는 모습만 봐도 너무 시다고 몸서리를 친다.
이 정도면 내가 남편에 대해 너무 잘 아는 게 아닌가?
20여 년 전 신혼 때, 남편이 저녁에 술 마시고 들어오는 날은 집 앞 과일가게에서 어김없이 참외를 한 봉지씩 사 왔다. 참외가 가득 든 까만 봉지를 빙빙 돌리며 들어와서
" OO아! (내 이름) 참외 사 왔다! 맛있는 참외 먹어라~"
라고 소리소리 지르다가 식탁 위에 던져주고 잤다.
그런데 내가 과일 중에 제일 안 좋아하는 것이 바로 참외다. 나는 딸기같이 달콤하거나 아니면 복숭아나 자두, 살구같이 새콤한 과일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 참외 안 좋아해. 참외 말고 복숭아나 자두 같은 거 사와 알았지?"
라고 꼭꼭 타일렀다. 남편은 알았다고 답하더니 술 마시면 어김없이 노란 참외를 사 왔다. 아니 맨 정신에는 과일 사들고 들어오는 법이 없는데, 술만 마시면 웬일인지 빠지지 않고 참외를 사 왔다.
내가 여러 번 이야기를 해줬어도 술만 마시면 마누라가 참외를 좋아한다고 생각되나 보다.
어카지? 참외는 별론데.... 그래서 집 앞 과일가게로 갔다.
"요래 요래 생긴 남자가 술 먹고 과일 사러 오거든, 참외 말고 복숭아나 사과나 다른 걸 주세요~"
과일가게 아저씨가 곤란해하더니
"우리가 손님한테 다른 걸로 사라고 하면 손님이 우리 가게 안 올 수도 있어요. 그러니 그냥 참외 사가게 하고 새댁이 다음 날 참외를 가져와서 다른 과일로 바꿔가요. 내가 얼마든지 바꿔줄게~"
라고 하셨다. 음... 아... 파는 사람 입장에선 그럴 수도 있겠군..
그래서 과일가게 아저씨랑 새댁 사이에 암묵적 합의가 이루어졌고,
나는 남편이 술 마시고 참외를 사 오면 다음 날 가서 내가 좋아하는 과일로 바꿔 먹었다.
작년 여름, 손님이 참외 한 박스를 사 왔다.
손님이 사준 거니 감사하게 받아 들고 와서 퇴근 후에 깎아서 내놓았다. 그런데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TV를 보고 있던 남편이 참외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러더니 와그작와그작 너무 맛있게 먹는 게 아닌가. 평소 남편이 과일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별로 본 적 없는 나는 그 모습이 신기했다.
"어? 과일 안 좋아하면서 참외는 잘 먹네?"
했더니.... 이 남자가 하는 말!
"내가 과일을 안 좋아한다고? 무슨 소리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 참외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 참외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 참외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 참외다!
나는 결혼 20년이 되기까지, 여태 과일을 별로 안 좋아하는 남편이 마누라 먹으라고 밤마다 참외를 사들고 온건 줄 알았다. 물론 참외를 사 온 건 언제나 말짱한 제정신일 때가 아니라 거나하게 취했을 때였지만... 술에 취하니 붙임성 없는 남자가 이쁜 마누라 생각나서 참외를 사들고 왔다고 믿었다. 남편과 참외에 대해 이야기해본 적은 없지만 나는 20여 년 동안 정말 나 주려고 사 온 걸로 의심 없이 믿었다.
그런데 실은 자기가 좋아해서, 먹고 싶어서 사 온 거였단다. 마누라는 신 과일만 좋아해서 참외를 사 오는 법이 없으니 먹고 싶어도 못 먹다가 술에 취해서 비척비척 걸어오는 날에는 집 앞 과일가게에 진열된 노란 참외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서 무심결에 담아 들고 온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