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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콩 Sep 02. 2020

거절할 수 없었던 그 목소리.

사람의 마음을 무장해제 시키는 목소리의 힘.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바꾼 거니?

남편은 어이없어했고, 딸과 아들은 의아해했다.
우리 집 분위기와도 맞지 않았고 평소의 내 성격에도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뭐 큰일이 난 건 아니다.  다만 오랫동안 써오던 인터넷 통신사를 갑자기 타 업체로 바꾼 것이다. 우리 가족들은 뭘 시작하면 가격 따지고 이해타산 따지며 요리조리 바꾸지 않고 그냥 처음 그대로 가는 성격이다. 큰일이든 작은일이든 중대한 일이든 사소한 일이든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억지로 좋게 표현하면 한우물 파는 스타일이고 정직하게 표현하면 귀차니스트다. 도대체가 뭘 바꾸는 게 귀찮다. 남편 성격이 그러했고 태생적으로 그랬던 건지 아님 같이 살아서  닮아진 건지 나도 그랬다.  그런 성격 때문인지  우린  대학교 2학년 때 만나서 사람 안 바꾸고 쭉 결혼까지 했다.


 집안의 가전제품들도 유행 따라 바꾸는 게 아니고 고장이나 파손 시에만 교체한다. 중개업을 하고 있지만 집도 잘 안 바꾼다. 그냥 한 집에서 쭈욱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확률이 높다. 

현재 살고 있는 집으로 6년 전에 이사를 왔는데 이사한 이유는 딸 때문이었다. 딸이 상의도 없이 통학이 불가능한 고등학교에 원서를 넣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학교 근처로 이사를 해야 했다. 이사를 준비하고 이삿짐을 정리하면서 남편과 나는  '우리 이 집에서 그냥 쭈욱 살자.  다시는 이사 다니지 말자' 고 의기투합했다.


그런 집안에  갑자기 통신사를 바꾸면서  기사가 방문하네  공유기를 교체하네  또  이것저것 결합해야 하니 이것도 바꿔라 저것도 바꾸는 게 좋다는 등 크고 작은 번거로움이 생긴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즐겨보는 채널이 한정되는 부작용도 생겼다.

딱히 바꿔야 할 이유도, 바꿔서 좋은 것도 없는데
 '사고'를 친 나를 가족들은 황당해했다.

엄마 대체 왜  그러신 거예요?

전화 한 통화 때문이었다.
온종일 전화기를 붙잡고 시달리는 직업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받아야 하는 업무적 전화 외 가족들과도 통화를 잘 안 한다. 무슨 보험회사니 무슨 혜택을 주니 하는 전화도 끝까지 듣지 않고 바로 끊어버린다. 보이스피싱? 어림없다. 그즈음 많은 혜택을 준다고 인터넷 가입회사를 바꾸라는 전화와 문자가 참 많았었는데,  20만 원을 주니 30만 원을 주니 해도 필요 없어요 바빠요 끊기 일쑤였다.

그런데 그 많은 전화 중에 어느 날 걸려온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


안녕하세요... 인터넷 통신사를 바꾸실 때가 된 것 같아서 좋은 정보 드리려고 전화했습니다.


 언제나처럼 두세 마디  떨어지기가 무섭게 툭 끊어야 맞다.  그런데 그러질 못했다. 처음엔 타이밍을 놓쳤는가 했는데 실은 통화를 중단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여성의 목소리에 제압당하고 있었다.


내용은 들으나 마나 뻔했다. 인터넷 통신사를 바꾸라는 것이고 요구하는대로 바꾸게 됐을 때 얻게 되는 혜택에 대한 설명이다.  그동안 숱하게 걸려온 다른 영업사원에 비해 나을 것도 없었다.  그런데 난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못 끊고 억지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대답도 고분고분 잘했다.  


네.. 그러죠... 그럴게요...


그렇게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전화를 끊고 신기했다. 내가 전화영업에 당하다니.... 남자도 아닌데 여자 목소리에 끌리다니...


혹시  단골고객이 하는 거였어?  아님 친구 누가 인터넷 영업 쪽에 취직했나?

 

가족들의 생경한 눈초리와  온갖 비난을 감수하며 번거로운 통신사 교체업무를 진행했다. 물론 쉴 새 없이 후회했다. 이게 뭔 짓이야 도대체...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도 잊어먹고 일상에 매달린 지 다시 1년쯤 후..

또다시 그 수많은 전화영업들을 타파해가던 가운데  한통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1년 전에 인터넷 통신사 바꿔드렸던 김 00입니다..


 다시 1년 전 그날과 같은 상태로 고분해져 있는 내 모습이 내게도 느껴졌다.  

그분은 말했다. 다른  혜택을 줄 테니 다른 회사로 바꾸라고...  또 시키는 대로 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가족들의 저항과 비난이 염려되었다.

그렇게  인터넷 통신사를 두 번이나  바꿨다. 실은 세 번째 바꾸려 했는데 가족들이 난리를 치는 바람에 정신을 차렸다. 세 번째 바꾸는 것까지 성공했다면 또 1년쯤 후 같은 목소리의 전화를 받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실패해서 나를 포기한 건가.. 다시는 그 여성과 통화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가끔  그 일을 떠올리게 되는 순간이 왔다.


전화영업을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는 일정한 톤이 있다. 상대방이 전화를 끊어버리기 전에 본론부터 꺼내야 한다는 다급한 마음에 기계적으로 쏟아지는 말투. 그리고 상대방의 반응과 상관없이 전달해야 하는 내용에만 충실한 일방통행식 발언. 그 의중에는 당신이 덥석 물어주면 좋고 아니면 다른 이에게 패스~~ 라는 미련 없는 쿨함이 숨어 있다. 실제로 내가 수용할 의사가 없다는 것이 전달되면 나보다 먼저  끊어버리기도 한다.


이런 유형의 수많은 전화통화 중에서 게으른 나를 움직이게 한 음색, 귀찮은 일을 싫어하는 성격과 빠르게 계산하여 별무소득이라고 판단되면 바로 철퇴를 두르는 만만치 않 성격을 순간에 무장해제시켰던 목소리톤. 


너네 엄마가 뭔가에 홀린 거야


그리스 신화에는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선원들을 유인해 죽음에 이르게 한 요괴 자매의 이야기가 있다. 세이렌이라는 요괴 자매는 사람을 황홀경에 빠지게 하는 마법의 목소리를 가졌다고 한다.


목소리에는 분명 마력이 있다. 매일 수십 통의 전화에 시달리는 나에게 그 여성의 목소리는 일상의 팽팽한 긴장감을 무장해제시키는 마력을 발휘했다. 딱히 예쁜 목소리였던 것 같지는 않다. 굳이 평가하자면 편안함을 주었다고나 할까..


나에게는 모든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빠르게 유불리를 계산하는 습관에서 벗어나고 싶은 원초적 욕구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욕구를  실행시킨 버튼은  화려한 시각도,  유창한 언변도, 달콤한 미각도 아니고

그냥 목소리였던 게 아닐까.

편안하고 인간적인 목소리...

어느날 불쑥 그 목소리의 주인공 김00 씨가 나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주었으면 좋겠다.

나를 포기하지 말아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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