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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성필 Oct 24. 2018

내가 받은 건 택배가 아닌 어머니의 정성과 마음

아이들과 나누고픈 내 부모님과의 추억 - Episode 7

군에서 제대한 1994년 2월, 봄 학기 복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여동생이 둘 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나까지 복학을 하니 집에 대학생이 세 명이나 되었다. 큰 여동생은 4학년, 둘째 여동생은 3학년, 나는 2학년. 세 명이 따로따로 하숙을 하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 것으로 예상한 부모님의 통 큰 결단으로 고속터미널 인근에 작은 아파트를 얻어서 여동생 둘과 같이 모여 살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부모님의 경제적 부담이 제일 컸던 한 해였다. 그래서 셋 모두 등록금을 줄여 보고자 성적 장학금을 타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고, 아르바이트를 통해 용돈 벌이도 했다.     


여동생들과 같은 집에서 살긴 했어도 각자의 바쁜 학교생활, 아르바이트, 친구들과의 약속 등으로 서로 얼굴을 마주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주중에는 밥도 각자 알아서 챙겨 먹고 - 나의 경우엔 대부분 라면에 김치였지만 - 주말에나 한번 정도 모여서 같이 밥을 먹는 패턴의 연속이었다. 어머니께서는 우리들이 끼니를 잘 챙겨 먹을 수 있도록 정기적으로 김치나 밑반찬 같은 것들을 만들어서 보내주셨다. 마침 고속터미널이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라 어머니께서는 사과 박스 크기의 상자에 먹거리 등을 담아 고속버스 수하물을 통해 보내주셨다.    

당시의 택배란 택배기사님이 친절하게 집에까지 배송해주는 시스템이 아니고, 고속버스 수하물 센터로 가서 직접 찾아오는 것이었다. 어쨌든 서울 집의 가장(?)이자 유일한 남자인 내가 그 배송을 담당했는데, 한 눈으로 딱 봐도 수하물 센터에서 찾은 사과 박스는 곧 터지기 일보 직전처럼 빵빵하게 채워진 데다가 원래의 모습보다 최소 15센티미터 이상은 높이가 위로 올라가 있었다. 혹시 박스가 찢어져서 내용물이 빠질까 봐 어머니께서는 보자기로 그걸 다 싸고 그 위에 노끈으로 묶어서 보내셨다. 20대 중반의 건장한 체격인 내가 들어도 너무나 무거워서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멈춰서 쉬고, 또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멈추고 하는 식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이렇게 꽉꽉 채워서 보내셨는지 모르겠다. 평소보다 몇 배의 시간이 걸려 집까지 낑낑대고 들고 와서는 내용물을 풀어보고 어머니께 전화를 걸어 버럭 화를 냈다. 아니 이런 것들은 서울에서도 다 살 수 있는 것들인데 왜 이걸 다 수화물로 보내서 이렇게 고생을 시키냐고. 내가 얼마나 애먹었는지 아시냐고. 그리고 힘드실 텐데 반찬은 또 왜 이렇게 다 만들어 보내시고, 김치만 보내면 되는데 깍두기는 또 왜 보내셨냐고. 어머니께서는 그래도 그게 아니라 하신다. 서울서 사면 비싸고 믿을 수 없는 것들이 많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다음부터는 확 줄여서 보내겠다는 약속의 말씀도 잊지 않고 매번 하신다. 하지만 그 약속은 매번 잘 지켜지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결혼을 하게 되었고, 명절을 포함해서 일 년에 몇 번 정도 고향인 대구에 내려간다. 주로 기차(KTX)를 이용하지만, 기차표를 미리 구하지 못했거나 다른 사정이 있어서 직접 차를 운전을 해서 갈 때가 있다. 그런 경우엔 귀경하는 날 아침에 난리가 난다. 


어머니께서는 고향집 냉장고에 있는 먹거리를 내 차 트렁크로 거의 다 옮겨 놓으실 태세다. 나는 제발 그만하시라고 말리고, 어머니는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챙겨주시려고 내 눈치까지 살피시면서 주섬주섬 자꾸 챙겨 넣으신다. 어머니께서는 이게 몸에 좋은 거니 가져다 먹으라며 집어넣으시고, 나는 이런 것이야말로 아버지나 어머니가 드셔야 한다고 다시 끄집어내고.        


나의 삼십 대 시절까지 그런 옥신각신하는 장면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불효막심하게도 솔직히 그 나이 때까지는 어머니의 심정을 잘 몰랐다. 그저 짐이 많아서 불편한 게 싫었다. 그러다가 내 나이 사십에 이르러 누가 특별히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하루아침에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아! 어머니께서 이렇게 챙겨주실 날이 영원히 지속되지도 않을뿐더러 심지어 얼마나 더 지속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에 이런 얘기를 했더니, 이제 내가 철드는 거라고 핀잔을 준다. 그리고 병환으로 어머니가 일찍 하늘나라로 떠나신 친구들은 어머니표 김치가 간절한데 더는 먹을 수 없어서 너무 슬프다고 했다. 계실 때 잘하라고 하면서. 아뿔싸! 내가 행복에 겨워서 때 아닌 비명을 지르고 살았구나 싶었다. 그 이후론 어머니께서 챙겨 주시는 것들에 대해서 일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뜻에 따랐다. 



나중에 아이들이 커서 결혼을 하고 집에 찾아오면 집사람이나 내가 무엇을 얼마나 챙겨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얘들이 그것을 받아갈지도 모르겠다. 이미 삶의 방식이나, 문화의 양상이 너무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어서 앞으로 5년 후, 10년 후를 예상하기가 어려워졌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도 맞는 말이고, 부모 없이 세상에 나온 자식 없다는 말도 맞는 말이다. 부모 자식 간의 대화가 점점 쉽지 않은 요즘의 세태지만, 그래도 소통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면 안 될 것 같다. 내 품 안에 내 울타리 안에 있을 날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서다.   

 

어머니께서는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손수 김장을 해서 택배로 보내주셨는데 이제 힘에 부치시는지 김장 속만 따로 해서 보내주신다. 그것만 해도 너무 감사할 따름이다. 내가 어릴 때부터 신김치보다는 갓 버무린 겉절이를 좋아하는 것까지 생각해서 집사람에게 겉절이를 해서 이런저런 음식과 같이 먹으라는 당부도 늘 잊지 않으신다. 어머니표 김치를 언제까지 먹을 수 있을 진 모르겠다. 영원히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그 맛은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일 것이다. 20대 학생 시절 어머니께서 보내주신 한 상자 가득한 수하물은 택배가 아니라 어머니의 정성이고 마음이었다는 것을 나이 오십이 넘어서 더 절실히 느끼고 있다. 살아계실 때 잘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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