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로 가정보육을 해야했던 8월의 어느 날. 호두는 일어나자마자 우유를 달라고 졸라댔다. 나는 우유를 주는 대신, 아침 밥상을 차리며 시간을 벌어봤다. 가뜩이나 소식좌인 애가 우유로 배를 채우고 밥을 안 먹을까 봐서. 그런데 쿠쿠는 밥이 완성되려면 십 분 정도가 남았다고 한다. 이를 어쩐담.
일단 유산균도 먹이고, 맛있는 영양제도 먹어고, 좋아하는 책도 좀 읽어보라고 세이펜도 쥐어줬다. 호두는 잠시 잊을만하다가 우유를 또 찾았다. 그러다가 계속 달라고 울고불고 짜증을 내길래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산으로 멸균 우유 하나를 쥐어줬다. 그러자 징징이는 평상시의 호두로 돌아가서 우유 한 팩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엄마가 밥을 제 때 안 차려줘서 배가 고팠을 거라는 생각에 미안했다.
그러는 사이 밥은 완성되었지만 호두는 영 밥을 먹을 기미가 안보였다. 차라리 씻기면 그 사이에 허기가 질 것 같아서 일단 목욕물을 준비했다. 그리고 애를 데리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아파트 방송에서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 한 관계로 잠시 후 9시부터 온수가 중단될 예정입니다. 작업이 마치는 대로 온수가 공급될 예정이오니 입주민분들의 많은 협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지금 시간 8시 57분. 도대체 온수가 안 나온다는 공고가 어디에 붙어 있었지? 요즘 엘리베이터에 애 데리고 탈 때, 모기 쫓고 하느라 공고를 하나도 못 봤던 것이다. 어디든지 나가려면 빨리 씻기고 나도 샤워를 해야 하는데... 눈앞이 캄캄했다. 나는 뭐 찬물로 해도 되지만 감기에 걸린 호두는 그러면 안 되었기 때문에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그래도 나는 목욕을 강행했다. 어디 한 번 해보자! 보통 9시가 된다고 바로 온수가 뚝 끊기지는 않았었기 때문에 도전이었다. 일단 뜨거운 물을 여러 군데에 받아두고, 애를 욕조에 앉혀 씻기기 시작했다. 다행히 십여 분 동안 따뜻한 물을 쓸 수 있었고 아이와 나는 샤워를 완료했다. 일단 애 옷을 입히는 게 먼저여서 뒷정리는 잠시 미뤄둔 채 안도의 한숨을 쉬며 목욕탕에서 나왔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었으니... 옷 하나 입는데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호두. 장난치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난리 부르쓰를 췄다. 겨우 옷을 입히고 머리를 말려주려고 하니, 이번엔 드라이기가 싫단다. 겨우 젤리로 어르고 달래서 드라이기를 갖다 댔는데 5초도 못 견디고 또 도망이다. 한참 씨름을 벌이다 내 몸은 다시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래도 겨우 애만큼은 보송하게 말려 놓으니 다행이다 싶어 남은 뒷정리를 하러 가는데... 그 순간 호두는 또 외쳤다.
"나 우유 줘."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인데? 누가 도돌이표를 해 놓았나? 다시 호두님이 기상한 그 시간, 그때, 그 상황으로 타임슬립한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10시. 우유로 또 배를 채우면 안 되니까 빨리 밥이나 차려주자 했는데 그 순간 빨래가 다 됐다고 세탁기가 나를 부르네? 아침이 너무 고되고 피곤했다. 혼자 몸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사건의 연속. 그래도 빨리 밥을 먹이고 대충 집 정리를 하고 외출을 하려고 다시 한번 힘을 냈다.
밥을 안 먹으려는 아이를 앉혀서 또 겨우 밥 한술 떠서 먹이고, 욕실 치우고, 마지막으로 놀던 장난감만 치우고 나가보자 했는데... 그 사이 호두는 거실과 모든 방 모두에 책을 다 꺼내놨다. 엄마 좀 살려줘ㅠㅠ 그 사이 남향의 아파트는 뜨겁게 달궈져서 도저히 에어컨 없이는 버티기 힘든 총체적 난국이 되어 있었다. (하필 소아과에서 호두 감기 때문에 에어컨을 되도록 틀지 말라는 자제령이 내려졌었다.) 나는 이 상황을 도무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버틸 힘이 없었고, 결국 난장판이 된 집을 뒤로하고 호두를 데리고 친청으로 탈출했다. 현관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어찌나 시원하던지! 그렇게 그 짧은 아침 시간 동안 벌어졌던 고통의 연속은 끝이 났다.
(8월의 고온다습한 공기가 얼마나 상쾌했겠냐만은 상대적으로 느꼈을 때)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옆 동네 친정집으로 가는 길은 청량함 그 자체였다. 도착해서 친청 엄마랑 아이랑 놀 동안, 나는 방 하나에 에어컨을 틀고 뻗어버렸다. 그제야 나는 천국에 온 것 같았다. 그리고 어린이집의 중요성, 감사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호두가 빨리 감기에서 낫길 빌고 또 빌었다. 기침과 콧물이 멈추고 등원을 하면 절대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었기 때문에. 정말이지 이런 난리부르쓰 아침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가 않다. 참고로 이 말인즉슨, 둘째는 없다는 소리다. 이 글을 읽을 남편이라는 독자님은 참고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