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에 생동감이 넘치기 시작하는 5월. 계곡에는 물이 흐르고, 돌에는 이끼가 자라고, 나무에는 새순이 돋고, 꽃을 피울 준비를 합니다. 지금 이곳에는 새뜻한 기운이 감쌉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에는 다양한 기후가 존재합니다. 기후에 따라 탐방로 입구에서부터 정상까지 오르는 동안 여러 층으로 나뉘며, 층이 바뀔 때마다 나타나는 새로운 장면들은 마치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거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한라산 해발 1,500미터, 아고산지대로 구분되는 해발 고도에서는 전 세계에서 가장 넓은 단일 군락을 이루는 나무가 있습니다. 최근 크리스마스트리의 원형으로 알려진 구상나무입니다.
구상나무는 영국의 식물학자 윌슨(Ernest H. Wilson)이 한라산에서 채집한 구상나무를 기준표본으로 하여 1920년 미국 하버드 대학교 아널드 식물원 연구 보고(The Journal of the Arnold Arboretum) 1권 3호에 신종으로 발표하며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구상나무가 처음으로 전문가에게 발견된 것은 1907년 일본과 한국에서 식물을 채집하던 프랑스인 선교사 포리(Urbain Faurie)와 타케(Emile Joseph Taquet) 신부에 의해서였습니다. 1909년 타케 신부는 다시 한라산과 지리산에서 구상나무를 수집하게 되었으나, 이때 만들어진 표본은 윌슨 이전까지 감정되지 않았습니다. 윌슨은 포리 신부의 채집품을 재료로 일본의 침엽수를 연구하던 중 한라산의 구상나무가 특산종일 가능성을 보았으며, 1917년 일본의 식물학자 나카이(Nakai Takenoshin)와 함께한 현장 조사에서 신종임을 확신한 뒤 1920년 새로운 전나무 속 식물 구상나무를 연구 보고에 발표하게 됩니다. 나카이는 1915년 지리산과 제주도를 조사한 식물 조사보고서에서 구상나무와 분비나무를 같은 나무로 기록했는데, 이후 윌슨과 함께한 한라산 조사 이후에는 구상나무와 분비나무가 다른 종임을 확인한 윌슨의 주장에 동의하게 됩니다.
구상나무는 과거 빙하기(신생대 3기)에 한반도까지 내려와 분포 역을 넓혔던 한대성 수종입니다. 간빙기에 다시 고위도 방향으로 후퇴하였는데, 이때 후퇴하지 못하고 고산지대로 피신한 나무가 한라산 및 내륙의 고산지대에 남게 되었습니다. 구상나무와 같은 고산 및 아고산대에 분포하고 있는 고산성 수목들은 서식처가 한정적이고 고립되어 있어 기후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서식지 감소 및 절멸이 우려되는 상황입니다. 구상나무는 한국에 분포하는 대표적인 고산성 식물로 기후변화에 의해 감소할 것이라고 예측되는 기후변화 지표종입니다. 이미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의 적색목록(Redlist)에 위기종(EN)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국내에서는 산림청 희귀식물, 환경부 국가 기후변화 생물지표종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제주도 세계유산본부는 구상나무의 쇠퇴 현상을 확인하기 위해 매년 암꽃 개화 상황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1그루당 암꽃 개화량은 2022년 이후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구상나무는 암수한그루로, 수꽃과 암꽃이 함께 핍니다. 5월, 지금 계절 꽃을 피우기 시작합니다. 암꽃은 길이 2cm 정도로 가지 끝에 달리고, 수꽃은 길이 1cm 정도로 타원형이며 암꽃보다 아래쪽에 달립니다. 구상나무는 타가수분(cross-pollination)이 이뤄지며, 수분이 이루어진 암꽃은 자라 타원형의 구과(솔방울)가 됩니다. 구과는 10월에 익는데 성숙한 구과의 길이는 4-8cm, 지름 2-3cm로 초록빛부터 자줏빛, 검은빛까지 그 색이 다양합니다. 구과의 색에 따라 붉은구상(A. Koreana E. W. Wilson for. rubrocarpa T. Lee), 검은구상(A. Koreana E. W. Wilson for. nigrocarpa Hatushima), 푸른구상(A. Koreana E. W. Wilson for. chlorocarpa T. Lee) 등의 품종으로 나뉩니다.
구과 결실은 구상나무의 현 상황을 알기 위한 바로미터입니다. 암꽃의 개화 상황을 보면 구과 결실을 예측할 수 있는데, 2022년 그루당 평균 120개가 달린 암꽃은 2023년 8.1개, 2024년 14개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올해 역시 구과를 맺는 암꽃이 많이 보이지 않습니다. 지난주 한라산 영실 탐방로를 다녀왔습니다. 영실 계곡, 병풍바위의 풍경은 언제봐도 질리지 않습니다. 병풍바위 끝에 올라 내려다본 영실은 초록 그라데이션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곧 완벽히 푸른 산으로 바뀌겠네요. 병풍바위를 지나면 구상나무 숲이 펼쳐집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넓은 구상나무 군락이 바로 한라산에 있죠. 이 시기가 되면 구상나무 꽃을 만나러 한라산에 자주 들릅니다. 정말 동네 뒷산 오르듯 한 표현이죠?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갈 수 있다는 건 축복입니다. 꽃이 피고 있었습니다. 나무 아래쪽으로 수꽃이 많이 보이는데, 암꽃은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듬성듬성 보이는 암꽃이 정말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보송한 솜털 같아 더욱 작고 소중하게 보입니다.
구상나무 꽃은 지금 이 시기에만 만날 수 있습니다. 열매를 맺기 전 아주 짧은 시간, 그것도 한라산에서만 만날 수 있기에 누구나 만날 수 없는 꽃입니다. 현재까지도 앞으로도 구상나무 꽃을 본 사람은 전 세계에서 몇 안 될 수 있습니다. 구상나무 꽃을 만난 특별한 사람이 돼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