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의 종이 인형은 고개를 들어주세요
성인이 되고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제가 어마어마한 ‘체력 쓰레기’라는 사실이요. 원래 몸이 약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생활 반경이 좁아서 달리 체력을 소모할 기회가 없었으니까요. 걸어서 10분 내외에 학교가 있었고, 15분 내외에 학원이 있었으며, 운동은 일주일에 두 번쯤 있는 체육 수업 시간에 하는 게 전부였거든요. 수업 시간에 자주 졸고 종종 어지럼증을 호소했지만, 잠깐 엎드려 자면 금세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경기도 일산에서 서울 중구에 위치한 대학교까지 통학하면서부터 달라졌어요. 오전 수업 때문에 아침 일찍 일어난 날이면 오후 3시부터 몸이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눈을 뜨기 힘들고 말 수가 급격하게 적어지며 어디에든 머리를 대고 눕고 싶은 충동이 생겼습니다. 그렇습니다, 체력이 방전됐다는 신호였어요. 핸드폰으로 따지면 배터리가 10% 미만이라고 빨간 불이 들어오는 거죠. 그래도 저는 휴식을 취할 수가 없었습니다. 늘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거든요. 수업 과제에, 방송 스케줄에(대학 방송국에서 아나운서로 일했을 때입니다), 대외활동에, 알바까지. 친구들 만나서 노는 것까지도 좀처럼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다이어리는 늘 빈틈없이 가득했고, 제 체력을 간과하고 벌려놓은 일들이 끝없이 몰아닥쳤습니다.
매일 혼이 빠진 듯한 얼굴로 일정을 소화하고 아슬아슬하게 막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집에 도착하면 밤 12시가 훌쩍 넘었고, 잠깐 소파에 기대서 쉬다가 화장도 지우지 못한 채 잠들어버리기 일쑤. 그마저도 불편해서 새벽에 깼고, 간신히 세수하고 다시 잤습니다. 아침이 영영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요. 야속하게도 해는 꼬박꼬박 뜨더라고요. 저는 또 부랴부랴 씻고 집을 나서기를 반복했습니다.
정신없이 시작되는 아침, 피곤한 채 흐르는 낮, 하루를 매듭짓지 못하고 잠드는 밤. 이런 식의 생활 패턴은 저를 정말이지 헐떡이게 만들었습니다. 모든 일을 마감 시간 직전에 간신히 끝냈으니까요. 어떤 한 가지 일에 공을 들인다는 것 자체가 사치였죠. 그래도 저는 정신승리를 하며 그런 삶을 고집했습니다. 나는 열심히 살고 있다, 이렇게 많은 일을 해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이렇게 세뇌했어요. 어느 하루라도 여유로운 날이 생기면 불안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게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틀렸습니다. 대학을 졸업할 때쯤 (1년간의 휴학과 한 학기의 졸업 유예로 25살에 졸업했어요) 지난 20대의 절반을 한번 뒤돌아봤는데요. 남은 게 없었어요. 그러니까, 껍데기만 현란하고 알맹이는 없었습니다. 이를 테면, 대외활동 경험란에 채워 넣을 ‘한 줄’은 얻었는데 그걸 자기소개서에 풀어서 쓸 특별한 이야기가 없었달까요. 당연합니다. 매번 대외활동 미션을 마감에 닥쳐서 제출했으니 내세울만한 성과가 나올 리 만무하죠. 아나운서를 준비하던 시절은 또 어떻고요. 한 단락을 한 문장, 한 어절, 한 음절까지 나눠 연습했어야 하는데, 늘 그랬던 것처럼 해치우는 식으로 연습을 하니까 실력이 늘 수 없었던 거예요. 그래 놓고 불합격의 이유를 외모에서, 또 방송계의 특수성에서 찾곤 했네요. 참 한심했습니다.
허무하더라고요. 왜 그렇게 하염없이 치열하기만 했는지. 제대로 해내지 못할 열 가지 일을 떠맡기보다는, 한 가지 일을 하더라도 신중하고 여유롭게 해냈다면 어땠을까요? 좀 더 고민하고, 성장하고, 결국 마음에 드는 결과물을 낼 수 있지 않았을까요? 또 정작 삶에서 중요한 순간들(가족과의 시간, 배움과 성취의 짜릿함, 여유, 행복, 그런 것들이요)도 놓치지 않았을 테고요.
그런 줄도 모르고 저는 세상을 원망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데 왜 내 몫의 성공이 주어지지 않는지에 대해서 말이에요. 나보다 게을리 살았던 저 친구는 왜 저렇게 승승장구하는지에 대해서도요. 저는 제 스스로가 마음에 안 들 정도로 못난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문득 평소의 습관과 가치관이 얼마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지 새삼 무서워졌어요. 바삐 일을 해치우는 하루하루가 모여서 지난 20대의 절반을 이루었으니, 제 20대의 절반도 숨 가쁘게 해치워버린 기분이 들더라고요. 이제와서지만 너무 아쉽고, 아깝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그때와는 다르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 체력에 맞춰서 스케줄을 잡으려고 하고요. 어떤 일을 끝내고 나서는 충분히 휴식할 시간을 줍니다. 다시 에너지를 모아서 다음 일을 준비할 수 있도록 말이에요. 그렇게 하니 모든 일에 공을 들일 수 있게 됐습니다. 자기 전에 하루를 점검할 여유도 생겼고, 건강한 몸과 뿌듯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누울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를 사랑할 시간이 생겼다는 게 제일 마음에 들어요.) 물론 이런 삶은 예전보다는 많은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지만요, 저는 이제 알고 있거든요. 그 기회를 잡으면 제가 원래 하고 있던 일도, 새로 시작하게 될 일도 그르치게 될 거란 것을요. 기회는 언제든 또 오기 마련이고 바쁘기만 한 삶은 제가 원하는 게 아니란 것도요. 서른이 되어 다시 20대 후반을 돌아봤을 때, (물론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는 늘 후회가 남겠지만) 적어도 제가 느끼는 감정이 ‘허무함’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끔은 옛 습관이 튀어나와, 여유도 없으면서 욕심을 부릴 때가 있기는 한데요. 그럴 때마다 다시 고삐를 다잡고 있습니다. 공들여 사는 하루가 모여 한 달이 되고, 1년이 되고, 제 삶을 이루기를, 누구보다 제가 바라니까요. 앞으로도 에너지 분배를 잘해야겠습니다. 저는 잘- 살고 싶거든요.
글 양유정
사진 김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