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겹살 구이
아침마다 삼겹살을 굽는다. 출근 준비하느라 바쁜 아침에 삼겹살을 굽는 건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지만 하루 중 가장 식욕이 왕성하고 또 마음 편히 먹을 수 있는 시간대가 아침이다 보니 별수 없다. 가스레인지 주변에 기름이 튀고 집안 가득 냄새가 떠다니긴 해도 엄마가 참아주는 이유는 단 하나. 더는 딸의 도시락을 싸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근 십 년이 넘도록 엄마는 아침이면 딸의 입맛에 맞는 반찬을 지지고 볶느라 고생했다. 한동안 엄마는 잘게 찢은 훈제 닭가슴살에 데친 청경채를 넣고 굴소스로 볶아 밥 위에 얹은 도시락을 싸다가, 또 어느 때는 잘게 썬 김치와 현미밥을 한데 넣고 (역시나) 훈제 닭가슴살을 작게 깍둑썰기해서 고슬고슬하게 볶은 닭가슴살 김치볶음밥을 내리 만들어야 했다. 입맛이 까탈스러우면서도 한 종목에 빠지면 몇 날 며칠이고 그 음식만 먹는 딸을 위해 엄마는 평일마다 루틴처럼 도시락 싸는 일을 해냈다. 그런 딸이 어느 날 갑자기 저탄고지 식단을 시작하면서 엄마에게 선심 쓰듯 이렇게 선언했다.
“이제 도시락 안 싸도 돼. 내가 알아서 할게.”
그야말로 엄마의 도시락 해방 시대가 온 것이다. 이제 엄마는 도시락을 싸던 시간에 소파에 앉아 뉴스를 보거나 텃밭에 나가 상추가 잘 자라는지 둘러보며 여유로운 아침 시간을 만끽한다. 가스레인지에 그깟 기름 좀 튀고 냄새가 진동해도 엄마는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딸의 분주한 모습을 거리를 둔 채 바라본다. 종종 호들갑을 떨며 도와달라 소리칠 땐(소금통 뚜껑 좀 열어 달라거나 기름장을 만들어 달라거나)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오기도 하지만 엄마는 대체로 만족스러운 얼굴이다.
삼겹살을 구울 때 나는 용적이 넓고 깊은 웍을 고집한다. 자동으로 회전하며 고기를 구워주는 냄비, 일명 통돌이가 있지만 세척이 번거로워 잘 쓰지 않는다. 프라이팬보다는 기름이 덜 튀고 고기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채소도 곁들어 같이 볶기 편해서 늘 웍을 손에 든다. 요리라곤 거의 해본 적 없는, 햇병아리도 못 되고 이제 막 알을 깨려고 부리를 쪼아대기 시작한 단계에 불과하지만 큼직한 웍을 왼손에 쥐고 있으면 어쩐지 내가 이 주방을 장악한 기분마저 든다. 고작 삼겹살이나 굽고 있지만.
고기가 잘 구워지는지 확인하며 집개로 뒤집다가 적당히 표면이 노릇해지면 미리 꼭지를 떼고 막대 썰기를 해 둔 가지를 넣어 슬슬 볶는다. 돼지기름을 머금을수록 가지의 보랏빛과 초록빛은 더욱 선명해진다. 냉장고 사정에 따라 삼겹살과 동침하는 채소는 꽈리고추일 때도 있고 새송이버섯이나 부추일 때도 있다. 돼지기름에 볶으면 웬만한 채소는 다 맛있어지지만 내 입맛에는 단연코 가지가 최고다. 삼겹살을 가지로 감싸 한입 베어 물면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재료가 맛의 하모니를 이룬다. 바이올린의 통통 튀는 음색 못지않게 쫄깃한 비계의 맛과 은은하게 퍼지는 피아노의 선율 같은 가지의 말랑한 단맛이 선사하는 완벽한 이중주. 내 머릿속에 굳건히 박혀있던 ‘목구멍에 기름칠할 때 먹는 음식’이라는 다소 해학적인 이미지는 어느새 말끔히 사라져 버린다. 가지 하나 곁들였을 뿐인데.
사실 돼지고기는 오랜 세월 내게 외면받아 온 식재료였다. 어릴 적 잠깐 살았던 시골에서는 잔칫날마다 돼지를 잡곤 했는데, 온 동네가 떠나갈 듯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돼지 울음소리가 잔음처럼 청각 신경계 어딘가에 남아있다. 멱을 따기 직전 달팽이 눈이 되던 돼지의 마지막 표정도 흐릿하게 떠오른다. 지나치게 선명해서 이 세상 색깔 같지 않던 붉은 돼지 피. 어른들의 상기된 표정과 마을 곳곳을 떠다니던 비릿한 냄새. 어린 나이에는 감당하기 힘든 자극적인 광경을 목격해선지 나는 스물 중반이 될 때까지 고기를 멀리했다.
내가 돼지고기, 정확히 말하면 삼겹살의 진짜 맛을 알게 된 건 첫 직장의 회식 자리에서였다. 한 사람 몫을 해내느라 정신없던 그 시절, 퇴근 후 동기들과 어울리며 자주 회식을 하곤 했다. 당시 우리는 치킨이나 떡볶이를(당시 회사가 신당역 근처에 있었다) 주로 먹었는데 월급날에는 무조건 삼겹살집에 갔다. 타인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집에서처럼 비계를 떼고 살코기만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나는 가장 작고 바삭해 보이는 삼겹살 한 점을 골라 입에 쏙 넣었다. 먹기 싫은 음식을 먹을 때 하는 습관처럼 숨을 참고 고기를 씹는데, 비계의 식감이 생각만큼 끔찍하지는 않았다. 맛이 느껴지지 않아선지, 아니면 너무 바짝 구운 탓인지 마치 바삭한 과자를 씹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맥주도 한 잔 마셨겠다, 알코올 덕분에 조금은 미각이 느슨해진 틈을 타 나는 숨을 풀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맞는 바람처럼 고기 굽는 냄새가 콧속을 후벼 파는 동시에, 혓바닥이 습자지가 되어 기름의 맛을 순식간에 흡수했다. 그동안 모르고 지냈던, 정확히 말하면 나 몰라라 했던 비계가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듯이 온 미각세포를 흔들었다. 비계가 이런 맛이라고? 흐물흐물 말캉할 거라 믿었던 저 덩어리가,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하다 못해 다디단 맛을 품고 있었다니. 신선한 맛의 경험이었다. 그날 이후 삼겹살의 비계는 내 입맛의 상위권에 올랐다. 물론 한동안은 ‘바싹 구운’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채였지만. 비계를 향한 거부감이 옅어진 뒤로 돼지껍데기도 뒤이어 상위권에 진입했다. 돈을 주고 왜 사 먹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던 음식이, 매콤한 양념 옷을 걸치고 불향을 뒤집어쓰자 천상의 맛으로 탈바꿈했다. 그야말로 내 삶의 식탁 혁명이나 마찬가지인 사건이었다.
일본 유학 시절에 삼겹살 구이는 향수를 자극하던 음식이었다. 달고 짠맛에 미각이 지쳐갈 무렵,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던 한 선배가 직사각형 모양의 전기 그릴팬을 넘겨주고 갔다. 룸메이트 J와 나는 한 달에 한 번, 내가 아르바이트 월급을 받고 J가 부모님에게 용돈을 받는 날이 되면 신주쿠에 있는 한국인 슈퍼마켓에 가서 1킬로그램짜리 냉동 삼겹살을 사다가 구워 먹었다. 그릴 팬 위에서 삼겹살이 노릇노릇해질 즈음 J의 집에서 보내준 신김치를 돼지기름 위에 철퍼덕 올렸다. 미리 깔아 둔 동네신문 위로 미세한 기름방울이 폭죽처럼 팡팡 터지며 진한 회색빛 흔적을 남기면 나는 길쭉한 삼겹살을 집개로 들고 가위로 숭덩숭덩 잘랐다. 고기라면 환장하는 J를 위해 넓적하게 자른 삼겹살을 그녀 앞으로 밀어주고 내 몫은 새끼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의 크기로 잘랐다. 삼겹살을 좋아하게 되었다고는 해도 너무 큰 비계를 덥석덥석 입에 넣기에는 어릴 적 입맛이 여전히 남아있었던 탓이다. 손바닥만 한 원룸 곳곳에 기름 냄새가 배든 말든 우리는 선배가 귀국한 그해 달력을 새것으로 바꿀 때까지 그릴팬에 부지런히 삼겹살을 굽고 김치를 볶았다. 다시 봄이 되어 J가 원하던 대학에 진학하고 일본어 학교에서 내가 해묵은 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그릴팬을 그녀에게 넘기고 도쿄 중심부 근처로 이사 갔다. 그 뒤로 종종 J의 원룸을 찾을 때면 신주쿠 슈퍼마켓에 들러 삼겹살 한 팩을 사 갔고 그녀는 어김없이 그릴팬을 꺼냈다. 여기에 술이라도 추가되면 우리는 타향살이의 고된 마음을 술잔에 담아 나눴다. 어떤 말은 설움이 복받쳐서 금방이라도 목구멍 밖으로 울컥한 덩어리가 튀어나오려 할 때도 있었다. 그러면 나는 팬 위에서 보글보글 잔거품을 일으키는 노릇한 고기 한 점을 입안으로 황급히 밀어 넣었다. 몸과 마음이 시도 때도 없이 허기지던 그 시절에 기름의 맛은 잠시나마 풍요로운 기분을 만끽하게 해 주었다. 삼겹살을 구워 먹는 그 순간만큼은 J도 나도 명절을 앞두고 고소한 냄새로 가득한 방앗간 주인이었고 석양에 넘실대는 너른 황금빛 평야를 소유한 농부였다.
아침마다 삼겹살을 구워도 이젠 유학생이던 그 시절의 기분을 느끼는 일은 없다. 굳이 삼겹살 구이가 아니어도 위안을 주는 음식은 허다하니까. 게다가 다이어트라는 목적을 가지고 의무적으로 매일 삼겹살 구이를 먹다 보니, 풍요롭던 기름의 향은 느끼한 맛으로 바뀌었고 폭죽의 잔해로 여겨졌던 기름방울은 골치 아픈 청소거리로 전락했다. 반짝이는가 싶더니 금세 스러지고 마는 불꽃의 잔해처럼 당시의 감흥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그럼에도 삼겹살을 구워 첫 한 점을 맛볼 때면 저물어 가던 내 이십 대의 어렴풋한 장면이 떠오른다. 키가 훌쩍한 내 어린 룸메이트와 그릴팬을 마주한 채 신문지 위에 앉아서 다정하게 고기를 구워 건네던 시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