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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pa May 29. 2018

반전 히어로 전개 없는 그런 이야기

2017년 2월 26일

소설보다는 논픽션 좋아하는 편인데 그중 안 읽는 책 종류가 자서전 위인전이다. 어렸을 때부터 관심이 안 갔다. 이래저래 구구절절 쉣한 상황에서 엄청난 노력과 날카로운 두뇌 혹은 비현실적인 미모, 부처스러운 인내심 등등으로 귀인을 만나고 천사를 감동시키고 한 나라를 울리고 뭐 어쩌고 해서 이렇게 대단한 일을 이루어서 위인전 목록에 이름 새겼다...가 기본 틀인 거 같은데 나에게는 해당사항 전혀 없다 싶어서였다. 그러던 어느날 들은 쇼킹한 소리.     


양파님이 롤모델이에요.     


아니 세상이 어떻게 망했길래 나 같은 애가 롤모델이 됐지. 대강 알려진 대학 학벌에 대강 알려진 회사 소속에 대략 좋은 직급이다 해도 결국 듣보잡 직장인 62346783인데, 그런 내가 롤모델인 이유는 여자로서 직장도 다니면서 애도 키우면서 뭐 등등. 그러니까 남자라면 롤모델일 이유 없으나 여자라서.     


흠.     

그럼 위인급까지는 아니라도, 내 얘기 좀 팔아도 관심 있을 사람이 있다는 말이잖소. 그래서 결심했다.     

엄청난 노력과 날카로운 두뇌, 비현실적인 외모 따위는 완벽 상실된 얘기를 아주 정직하게 쓰겠어. 나에게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져 삼 년이 지나 새벽 세시지만 즐겁게 우는 아이 달래는 남편 얘기 따위 없고, 다들 쟤 뭐냐 무시했으나 출근 첫날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창의력과 무박 5일 깡 하나로 버텨서 프로젝트 성사시키는 그딴 반전 히어로 전개 전혀 없는 그런 얘기를 하겠어. 

친절 성실 봉사의 훌륭한 인성으로 어쩌다가 귀인을 만난 게 아니라 사실은 사회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서 그럭저럭 애쓴 만큼은 잘 풀렸고, 아프리카 출신 여자 외노자 신분으로도 한국에서 고스펙 여자로 취준하는 것보다 훨씬 쉬웠고, 비현실적인 외모 없이도 가사분담 나보다 더하고 애들 잘 키우는 남편과 결혼했고, 그게 뭐 내가 엄청 사랑스러운 존재라서, 사랑받아 마땅한 여자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그게 정상이고, 노오오오오력 같은 거 시동도 못 거는 의지력 상실 집중력 기본 장착 안 된 모델로 인내심 같은 거 약에 쓰려도 없지만 어찌어찌 괜찮은 직장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 아주 적나라하게 까주겠어. 워킹맘으로 자기 관리도 완벽하게 하고 집도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 광고 같으며 애들에게 유기농 아닌 음식은 주지도 않는 그런 광고 속 슈퍼우먼 말고, 체력 좋지만 날씬하지 않고, 맨날 치운다고 치우지만 집 폭탄 맞았고, 애들 무척 예쁘지만 월욜 아침에 출근길이 너무 감사하고, 아무리 돈지랄해도 카바 안 쳐지는 육아와 가사의 어두운 그늘을 HD 화질로 중계해주겠어....라고 결심하였다. 역시 난 야망으로 넘치는 냥파냥파.     


그러는 의미에서 예전 글 재활용. 나를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는 이들에게.


https://www.facebook.com/londonyangpa/posts/1845722645713214

https://brunch.co.kr/@yangpayangpa/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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