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남편이 까르보나라 파스타를 해주겠다고 했다. 요섹남 캐릭터가 붐을 이루던 시기였던 것 같다. 뭔가 요리라는 것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조금 의심스럽긴 하지만,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가득 찬 표정을 보니 굳이 말리고 싶진 않았다.
내가 지켜보면 긴장된다며 방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지만, 사실은 잔소리가 듣기 싫었던 것 같다. 배도 고프고 기운도 없었던 터라 들어가 누워 있으려는데 남편이 자꾸만 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라윤 씨~~ 우유는 어디 있어? 양파랑 마늘은? 생크림은 있어? 면은 얼마나 넣어야 돼?"
대강 답을 해주긴 했는데 역시 불안했다. 설명해주다가 살짝 피곤해져서 이러다 결국 또 내가 다 하는 거 아니냐며 한마디 했더니 남편은 뭔가 찔리는 듯 말이 없었다.
생각해보니 뭔가 만들어주겠다고 선언한 적은 종종 있었다. 그런데 손도 느리고, 재료가 어디 있는지 찾지도 못하고 뭐부터 해야 하는지 순서도 헷갈려하다 보니 어느새 정신 차리고 보면 내가 음식을 하고 남편은 살짝 보조만 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갑자기 뭔가 큰 결심을 한 듯 나를 밀듯이 방으로 들여보낸다.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고 절대 나오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다가 졸려서 살짝 잠이 들었는데, 남편이 나를 깨웠다.
"미안해. 배 많이 고프지? 아무래도 저건 못 먹을 것 같아. 우리 그냥 뭐 사 먹자."
잔뜩 풀 죽은 얼굴이었다. 너무 배고파서 기운도 없고 우선 상황을 파악하려고 주방으로 갔다. 가지 말라고 말리는 남편을 뒤로한 채 가스레인지 쪽으로 가보니 큰 웍 한가득 파스타 면이 수북이 담겨있다. 어디 잔치라도 하시려나. 대체 파스타면을 얼마나 넣은 거지? 당황스러움을 감추며 맛을 살짝 봤다. 신기하게도 정말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분명 재료들은 다 꺼내져 있는데,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뭐지, 혹시 앞으로는 절대 요리를 시키지 못하게 하려는 그의 큰 그림인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정신을 차리고 뒤에 서 있는 남편을 바라보니 시무룩한 표정으로 입이 조그마해져서는 구구절절 변병을 늘어놓았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아니, 난 분명히 넣으라는 거 다 넣었는데, 블로그도 보고 하라는 대로 했는데 이상해. 그냥 뭐 시켜먹자 이거 내가 버릴게."
"음식 버리면 벌 받아. 아귀 지옥 가서 코로 먹어야 된다고."
너무 풀 죽어 있는 게 안쓰러워서 괜히 실없는 소리를 해대며 물어봤다. 면은 얼마나 삶았는지, 삶을 때 소금을 넣었는지, 우유와 생크림은 어느 정도 넣었는지. 내 손 크기로 엄지와 검지로 면을 말아쥐었을 때 동전 크기 정도가 1인분이라고 했는데 본인 손으로 OK 하듯이 큰 원만큼을 1인분으로 넣었단다. 당연히 면 삶을 때 소금도 살짝 넣었고 뻑뻑해지는 거 같아 나중에 우유를 더 넣었다고 했다. 면 삶을 때 소금이 생각보다 많이 들어가야 간이 밴다. 1인분 기준 평평하게 깎아서 밥숟가락 한 스푼은 넣어야 한다. 면 삶고 남은 물(면수)도 조금 남겨서 농도와 간을 맞출 때 추가하는 게 좋은데, 그냥 다 버렸단다.
그동안 기다린 게 아깝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급히 응급조치를 해 보았다. 소금 간도 추가하고, 파마산 치즈가루도 넣고 우유랑 슬라이스 치즈도 넣었더니 얼추 먹을 만은 해졌다. 문제는 양인데, 그 사이 또 불어서 더 많아진 것 같긴 하지만 몇 시간 동안 만든 정성을 봐서라도 먹을 수 있는 한 최대한 먹어줘야지 싶었다.
꾸역꾸역 먹는데 배가 많이 고픈 상태인데도 불어버린 파스타는 퍽퍽하니 잘 들어가지 않았다. 아무리 먹어도 기분 탓인지 양이 줄어들지 않고 더 늘어나는 것 같아 무서운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한 걸 테니 나도 성의를 보이고 싶은 마음에 꾸역꾸역 열심히 먹었다. 그런데 정작 남편은 몇 번 먹더니 포크를 놓아버렸다. 미안하지만 도저히 못 먹겠다고 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갑자기 화도 조금 났다. 아니 나는 뭐 맛있어서 먹는 줄 아나. 아우 어찌나 얄밉던지... 결국 다투고 말았다.
지금 떠올리면 그저 귀엽고 재미있는 에피소드인데, 한동안 그걸로 놀리면 남편이 자꾸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버렸다. 그러더니 다음에는 파스타 말고 스테이크를 해보겠다고 했다. 이 사람은 나를 얼마나 더 웃기려고 이러는 걸까. 이상하게 싸늘한 기분이 드는 건 내 착각이겠지.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