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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재 Dec 23. 2020

꼭, 서울에 살아야 할까.

나의 서울 독립 이야기

© cadop, 출처 Unsplash


서울에 가면 성공하는 줄 알았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TV에서도, 내가 보고 듣고 자란 대부분의 것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만 이루면 된다는 뜻의 속담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에서 특정한 지명이 서울인 데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말은 제주로, 사람은 한양으로'라는 말은 무릇 사람이라면 꼭 서울에 살아야 하는 것처럼, 서울에 살지 않으면 성공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자연스럽게 내 목표는 '인서울'이었다.('자연스럽게'라는 말은 참 무서운 것 같다.) 공부를 못했으면 이야기가 달라졌을까 싶지만, 학급 석차는 물론 전교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던 나로서는 '인서울'이라는 세 글자가 적당히 가시적이라 더 매력적이었다.


스무 살이 된 나는 꿈을 이뤘다. '인서울'도 모자라서 'SKY'에 합격하고야 만 것이다. 학교에 걸린 합격 플래카드 속 '연세대 1명'이 나라는 사실은 서울과 고향의 거리 300km만큼을 신분 상승시켜주는 느낌이었다. 이미 성공한 것 같았다.



그렇게 올라온 서울인데, 어쩐지 나는 점점 더 서울이 불편해진다.



처음으로 혼자서 750번 버스를 타고 학교 앞 정류장에 내릴 때, 나는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하차벨을 언제 눌러야 하는지 몰라서 눈치만 봤다. 곧 도착할 것 같은데 아무도 누르지 않아서 마음을 졸이다 못해 내 몸이 쪼그라드는 줄 알았다. 막상 버스가 멈춰 섰을 땐 거의 모두가 하차했지만.


공강 시간에 친구들과 신촌 카페에 갈 때, 나는 몸이 얼어버렸다. 주문을 위해 입 한 번 떼기 어려웠던 건 물론이고 겨우 주문을 마치면 어디에서 기다려야 할지, 음료는 어디서 받아야 하는지 눈도 몸도 둘 바를 몰랐다. 체면만 차릴 줄 알지 한없이 소심했던 이방인은 '그래도 서울에 왔으니, 나는 성공한 인생이야'라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 yohoney, 출처 Unsplash


만 8년을 채워가는 서울살이, 나는 성공하지 못했다.


갓 상경한 지방러에게 밥을 떠 먹여줄 것 같았던 서울이었지만 이제는 집 하나도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 지방대를 졸업한 내 친구들은 나보다 더 빨리 취업을 해 돈을 모았다. 서울에서 만난 대학 동기들은 나보다 큰 규모의 회사에 취업해 워라밸을 누리고 있다.


반면, 느긋히 졸업해 스타트업에 다니고 있는 나는 '대학 합격'이라는 운명으로 둥지를 틀게 된 서울에서 퇴보하지 않으려 하루하루 발버둥 칠 뿐이다. 


무엇보다 취향이 없는 것이 큰일이다. 서울에서 살아남으려면 일단 아끼고 보자 했던 것이 어느덧 취향을 찾을 새도 없이 8년을 흐르게 했다. '과연 내게 서울이 정답일까'라는 취향에 대한 물음표도 최근에서야 조금씩 던지고 있다.


일 년에 몇 번 되지 않는 고향 나들이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올 때, 결국 눈물을 쏟고야 말았다. 결국이라고 하기엔 여러 번이다. 본가에서의 마지막 날이 되면 엄마는 막내딸의 서울행이 아쉬운 나머지 무심해져버리고 만다. 나는 엄마의 뒷모습도 그저 바라만 볼뿐이다. 우리의 만남은 언제나 한 여름밤의 꿈만 같다.

© altography, 출처 Unsplash

서울에 몰릴 수밖에 없는 사회적 시스템을 극복할 수는 없을까. 이대로 엄마 아빠와 일 년에 몇 차례만 만나는 사이로 남아야 하는 걸까. 나는 무엇 때문에 서울에 남아있는 것일까.


나는, 꼭 서울에 살아야 할까.

성공하면 서울이 좋아질까.


그런데, 내가 원하는 건 성공일까.

나에게 중요한 건 무엇일까.


'서울' 두 글자에 내 마음은 오늘도 한강을 떠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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