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 진동이 울리기 시작한다. 핸드폰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하고, 몇 번의 진동을 자그마한 한숨에 섞어 흘려 보낸 뒤 수신 버튼을 누른다. 잘 지내냐는 말, 아픈 데는 없냐는 안부, 바쁜 거 지나면 가족이 다같이 식사하자는 말에 모범적인 답변으로 대충 얼버무리며 바쁜 일이 생긴 척 통화를 급히 마무리한다. 40대를 바라보고, 곧 아빠가 되는 아들의 안부가 뭐가 그리 궁금하고 소중한지 조금이라도 귀찮은 티를 내면 어머니는 금방 토라져버린다.
내가 담임으로 있는 우리 반 남학생 한 명은 종종 모자를 쓰고 등교한다. 우리반 규칙 상 실내에서는 모자 쓰는 것을 금지하였으므로, 교실에 들어오는 순간 모자를 벗는데, 벗은 모자 안에는 항상 아이의 귀여운 까치집이 있다. 보여주기 싫고 가라앉게 하고 싶은 고작 그 까치집이 담임 교사인 나에게는 큰 울림을 준다. 그 까치집을 만드는 것은 언제나 사랑이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초등학생 시절의 나는 여자애들에게 꽤나 인기가 있었다. 모나지 않은 얼굴에 타고 나길 남을 웃기길 좋아하고 나서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라 반 친구들이 좋아할만한 말과 행동들을 했고, 그런 것들이 켜켜이 쌓여 인기의 탑을 쌓았을 것이다. 물론 그 인기가 학교에서 유명한 인물까지는 아니었고 반에서나 그럭저럭 가벼운 방귀 정도는 뀔 수 있는 아이정도였다는 것이다. 그런 나에게 아침에 자고 일어나는 까치집은 나의 인기를 깎는 결함 중 하나였다. 초등학생 때는 분주한 아침에 머리를 감는 것은 어른인 부모님의 특권이었고, 저녁에 머리를 감고 말리기까지 해야 하는 일이 우리의 숙제였다. 숙제를 마친 뒤 주어지는 오답 노트인 까치집은 항상 나의 콤플렉스였고, 숨기고 싶은 치부였다. 그래서 아침마다 고작 손 두마디만한 그 까치집이 태산이라도 되는 양 연신 분무기를 뿌려대며 그 산을 깎으려 애썼다. 하지만 이 생활은 아빠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며 끝이 났다.
중3 시절, 담임 선생님께 교무실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교무실로 가니 길게 말은 안하시고, 집에서 연락이 왔으니, 조퇴를 하고 집으로 얼른 가라는 말씀을 하셨다. 부모님 모두 성실함을 타고난 기질로 갖고 계셔서 초등학교 6년 개근을 당연시하는 분인데 나에게 조퇴를 시킨다니, 여간 보통 일은 아닐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집에는 부모님 대신 이모가 나를 본인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 기다리고 계셨고, 이 때부터 나는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한 아버지, 옆에서 병간호를 하시는 어머니 대신 약 1년간 이모의 손에 크게 되었다. 이모의 집은 내가 저녁에 머리를 감던, 아침에 머리를 감던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사실 안 감아도 몰랐을 것이다. 그런 무관심 덕에 나는 아침에 머리를 감을 수 있었고, 그 덕에 이제 나는 아침에 큰 산을 깎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름의 두발 자유를 얻었지만 그 때의 나는 그 자유의 담보로 그 나이의 아이가 받아야 할 사랑을 잃었다. 아직도 나를 만나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반찬이 김이라고 말하는 이모를 보면, 이런 생각을 다시금 확인한다.
이렇듯 나에게 까치집은 사랑이었다. 겨울 아침에 머리를 감고, 제대로 말린 채 나가지 않으면 몸이 허약한 내가 감기에 걸릴까 걱정하시는, 그래서 퇴근 후 그 피곤한 밤까지도 아들이 머리를 감고 말리는 것까지 굳이 보려하시던 부모님의 마음이 그 때의 내 까치집을 완성했던 것이다. 이런 마음에 우리 반 남학생의 까치집을 보고 있노라면 '너희 부모님도 너를 많이 사랑하시는구나.' 속으로 생각하며 문득 부모님 얼굴이 떠오른다. 내 가정을 꾸린 뒤로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귀찮아하는 반쪽짜리 어른인 나에게 우리반 학생이 보여준 그 자그마한 까치집은 그렇게 큰 울림을 주었다. 물론 이제 내 머리에는 까치집이 없다. 하지만 이제 까치집 없이도 부모님의 사랑은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마침 까치 우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오후, 핸드폰을 들어 통화 버튼을 꾹 누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