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과 평화의 공존
무강이와 산책을 할 때 나는 전방의 시야가 매우 넓어진다. 때로는 등 뒤를 한번씩 돌아보기도 한다. 무강이가 정신없이 땅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주변에 뭐가 오지는 않는지 살핀다. 자전거라도 빠르게 다가온다면 바로 줄을 짧게 잡고 무강이의 앞을 막는다. 무사히 자전거가 지나가면 다시 가던 길을 간다. 멀리 산책을 하는 강아지가 보인다. 우리와 서로 마주칠 것 같다. 나는 방향을 돌려 무강이가 그 개를 보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개코는 다른 개의 냄새를 너무 잘 맡는다. 무강이는 기어이 고개를 돌려 그 개가 있는 방향으로 코를 킁킁거린다. 내 몸은 무강이의 뜻을 무시하고 강아지를 보지 못하도록 얼른 걸음을 서두른다.
모든 강아지가 친구를 좋아하진 않는다. 그러나 많은 반려인들이 다른 강아지를 만나면 무작정 인사하게 두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무강이가 어렸을 때 그런 실수를 범했다. 강아지는 노는 걸 좋아하고, 재미있게 놀려면 친구가 있어야 하니까 당연히 친구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강아지는 노는 걸 좋아하는 뽀로로가 아니라 동물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오래 전 늑대로부터 진화한 개는 사람과 함께 사는 방식을 터득하면서 생존 방식을 바꿨다. 사람과 친하게 지낼수록 이득이지만 같은 종인 개와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자원을 나눠야 하는 하나의 경쟁자일 뿐이다.
무강이는 이런 경쟁적인 삶의 방식에 몸에 밴 강아지다. 무강이가 우리에게 오기 전 살던 곳은 흙탕물과 똥이 가득한 농장이었다. 여기저기 사람들의 손을 타며 파양을 거듭 당하던 녀석이 마지막으로 엉덩이를 붙인 농장엔 이미 다른 개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주인은 며칠에 한번 오는지 빨간 다라이에 사료를 부어놓는 것으로 케어를 끝내곤 했다. 다라이의 사료는 아무나 먹을 수 없는 소중한 음식이었다. 그래서 서열대로 먹어야 했다. 나이도 어리고 짬도 없는 어린 강아지는 사료 대신 흙과 똥을 먹어야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래도 무강이는 밝았다. 어린 강아지 특유의 에너지로 농장을 마구 파헤쳤나보다. 보더콜리가 인기라길래 이걸로 새끼나 쳐서 돈 좀 벌어볼까 했던 주인은 무강이의 저지레를 감당하지 못하고 파양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 결심에 우리 부부가 응답했다.
이런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만나는 모든 개가 전부 경쟁상대로 보이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강이에겐 강아지 친구가 많이 없다. 처음 보는 강아지가 있다면 아예 근처로도 다가가지 않는다. 예쁘다며 다가와주는 건 감사하지만 내가 먼저 손사레를 치기도 전에 무강이가 살벌하게 짖어 내쫓아버린다.
경쟁은 친구에게도 가차 없다. 무강이의 유일한 남자친구인 제이콥에게도 그렇다. 무강이에게 나는 엄청난 자원이다. 그런 나의 손길이 제이콥에게 닿는 걸 아주 싫어한다. 그나마 제이콥이나 되니까 함께 옆자리에 앉을 수 있긴 하지만, 그래도 간식을 주는 건 참을 수 없다.
우리는 무강이의 방식을 존중하지만 그래도 도시에서 살려면 어느 정도의 본능을 억눌러줘야 했다. 그것을 교육이나 사회화훈련이라고 부른다. 무강이가 도시에서 살려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우리는 지금도 산책을 하면서 다른 강아지가 보이면 무조건 앉거나 멀리 떨어져서 우리에게 집중하는 훈련을 한다. 최대한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고 우리를 보며 저 개는 너에게 절대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한다. 믿을 거라곤 오로지 자신의 이빨 뿐이었던 개는 우리의 끈질긴 메시지를 들으며 조금씩 우리에게 귀를 기울여주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무강이와 다른 개의 거리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 10미터 바깥에서 냄새만 맡아도 난리가 나던 무강이는 이제 5m 거리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갈 수 있게 되었다. 아직 길가에서 서로 스칠듯한 거리로 지나가는 건 불가능하지만 간식으로 조금만 유혹한다면 평화로운 산책을 마칠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평화와 경쟁은 공존이 불가능한 제도다. 남을 이겨야 하는 경쟁의 특성과 싸우지 않고 화목한 상태를 뜻하는 평화는 근본부터가 다른 상황이다. 나는 평화로운 공존을 원하지만 무강이의 본능은 절대 안된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생존에 대한 본능은 경쟁에서 이길 힘을 길러주고 삶을 좀 더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소중한 삶의 동기를 만들어준다. 그러나 그것이 남을 해하는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사람도 아닌 개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의아해하겠지만 어쨌든 무강이도 다른 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하는 도시의 일원이기 때문에 이 방식을 반드시 숙지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무강이의 경쟁과 생존본능은 삶과 직결된 것이었다. 아마 그런 생존본능이 없었다면 우리에게 오기도 전에 농장의 다른 동물들에게 해를 당해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무강이의 본능이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는 이제 농장이 아니다. 우리와 함께 사는 이 곳엔 빨간 다라이에 담긴 눅눅한 사료도 없고 냄새나는 똥도 없다. 따뜻한 집에 푹신한 소파와 침대, 매일매일 새로 주는 음식이 있다. 그러니 이제 날을 세워 자신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무강이는 3살이 된다. 태어난 정확한 날짜는 모르지만 개월수를 판단하니 올해로 태어난지 3년이 되는 해다. 4개월 때 데려왔으니 2년 반이라는 세월을 함께 보낸 셈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알았다. 무강이에겐 끈질긴 시간이 더 필요했다. 2년반 동안 네 주변은 안전하다고 말해주었지만 아직도 그만큼을 더 말해주어야 했다. 2년반 전의 무강이와 지금의 무강이를 비교하면 완전히 다른 강아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도 아직까진 세상에 대한 경계를 많이 풀지 못하고 있는걸 보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
강아지에겐 찰나의 기억이 더 오래 남는 것 같다. 아주 짧은 순간 만났던 사람을 기억하고 반가워하는 걸 보면 정말 똑똑해보인다. 가끔은 자신과 싸운 개의 냄새를 멀리서 맡고 털을 바짝 세우며 흥분하기도 한다. 영문을 모르던 나는 한참 후에 멀리서 나타난 개를 보고 그제야 그 이유를 알아차린다. 예민한 짐승의 감각은 사람의 능력보다 훨씬 뛰어난다.
무강이는 앞으로도 쭉 도시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너의 생존본능을 꼭 그렇게 날을 세워 발휘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아직도 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거라는 자책감도 함께 받는다. 무강이가 나를 더 온전히 믿어주도록 내가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너의 경쟁과 생존본능은 이제 터그놀이할 때나 쓰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