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우절 특집)아내를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날

by 박정훈

일요일 아침. 젊었을 때는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잠에서 깨기가 어려웠지만 나이가 오십에 가까워지면서 해가 창문으로 비추면 여지없이 잠이 깬다. 동갑인 아내는 아직 신체 나이가 나보다는 젊은지 방안에 해가 충분히 들어왔는데도 아직 비몽사몽이다. 나는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고 커피를 내릴 준비를 한다. 평온한 일요일 아침 주방으로 퍼지는 구수한 커피향은 일주일을 잘 보낸 나에 대한 보상이며, 다가오는 일주일을 위한 격려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자꾸 벽 한 면을 채우고 있는 달력에 눈길이 간다. 월의 첫날이라 달력에 해야 할 일들이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다. 나는 이런 하얀 여백이 기분 좋다. 머그잔에 커피를 채우고 아내가 잠을 자고 있는 안방으로 향하는데 달력 안의 숫자가 눈길을 끈다. 숫자는 알 듯 모를 듯 미소를 짓는다. 숫자의 미소에 내 장난기가 발동한다. 잠이 덜 깬 아내는 내 인기척에 힘없는 대화를 건낸다.


“자기, 벌써 일어났어? 몇 시야?”

“아홉 시. 이제 일어나야지.”

“알았어.”

“나 할 이야기가 있어.”

“뭔데. 졸린데 이따가 해.”

“지금 해야 해!”

“중요한 일이야?”

“응. 나 너를 사랑하지 않아!”

“무슨 소리야. 갑자기. 어제 뭐 잘 못 먹었어?”

“좀 진지하게 받아들여봐. 너를 사랑 안한다고.”

“왜!”


아내의 목소리에서 짜증이 섞여 나왔다.


“뜬금없이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만우절이니까.”


아내는 달력을 흘끗 보더니 베개를 집어 들더니 있는 힘을 다해 던졌다. 베개는 장난기 가득한 내 얼굴에 착 달라붙는다.


“잠을 깨우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만우절은 역설이 통하는 날이다. 역설은 때론 진실보다 강력하고 더 찐한 표현으로 마음을 전할 수 있다. 만우절에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짓은 평일 날, 전하는 사랑보다 효과적이었다. 잠이 다 달아난 아내는 내게 언제쯤 철이 들거냐고 물어본다. 나는 별로 철들고 싶은 생각은 없다. 무겁고 진지한 부부생활보다는 초등학교 아이의 소꿉놀이 같은 즐거움이 좋다. 배가 나오고, 주름이 이마를 헤집고, 머리가 허옇게 되어가고 있지만 아내와 나는 언제나 어제보다 나은 오늘의 연애를 기대한다. 가끔 나는 아내와 나의 버킷리스트를 적어본다.


도서실에서 같이 책보면서 장난치기.

지하철 역 근처 자판기에서 같이 커피 먹기.

날씨가 좋으면 아무 생각 없이 떠나기.


아내와 나는 결혼할 나이가 되어서 만났다. 첫 만남의 호감은 밀당도 없이 결혼으로 향했다. 이년 정도 연애를 했지만 그 시간을 우리는 서로가 원하는 미래를 채우는데 썼다. 서로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지 아슬아슬하고 긴장이 우리 연애에는 없었던 것 같다. 잘 보낸 시간이었지만 결혼을 하고 몇 년이 지나 아내는 그 시간을 아쉬워했다. 조금 더 기억나고 설레이는 연애를 아내는 원했다. 아이가 크고 둘만의 시간이 많아졌다. 안방에 걸려있는 야외 촬영 사진. 아내와 나의 풋풋함이 남아있는 사진을 볼 때마다, 좀 더 시간이 가기 전에 우리는 연애의 추억을 만들 필요가 있다. 젊은 시절 못 다한 연애를 그리워하는 아내는 이따금 다른 불평도 한다.


“꿈도 희망도 없고 자꾸 나이만 먹어서 슬퍼.”

“뭐가! 지금 마음도 편하고 딱 좋구만.”

“결혼사진 봐! 저때는 피부도 탱탱하고 좋았는데.”

“지금도 탱탱해!”

“장난치지마! 이제 죽을 날짜만 기다리는 것 같아.”

“나이 오십도 안 되서 쓸데없는 소리는.”

“자기는 젊은 시절도 돌아가기 것 싫어?”

“그 치열한 젊은 시절로 돌아가라고? 나는 싫다.”

“그래도 그때는 꿈과 희망이 있어서 좋았잖아.”

“지금 우리는 젊었을 때 가졌던 꿈과 희망 위에 있잖아. 네 주위를 돌아와. 젊었을 때의 꿈과 희망은 이미 우리 곁에 있어. 우리는 이제 즐기기만 하면 되잖아.”

“내가 말로 너를 어떻게 이기니!”


사람들은 가끔씩 과거로 돌아가 현재 시간을 되돌리기를 바란다. 과거에 남겨진 후회를 지우기를 원한다. 아내도 가끔씩 똑같은 이야기를 하지만 그때마다 내 대답은 항상 똑같다. “싫어!”이다. 왜일까? 아내와 큰 굴곡 없이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지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전화라도 제때 안되거나 조금이라도 아내가 시쿤둥하는 날이면 온갖 상상 속에서 소설책 한권을 썼다. 지금은 아내가 전화를 받지 않아도, 삐져 있어도 항상 내 눈앞에 있다. 처가어른들과 함께 사는 우리부부에게 아내가 숨을 수 있는 곳은 겨우 장모님 방뿐이다. 때론 이 상황이 미안하기도 하다. 나이가 들면서 가끔은 혼자이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출장이 많아 혼자만의 시간이 제법 있지만 집과 직장만을 오가는 아내에게 혼자만 공간에서 혼자만의 시간은 쉽지 않다. 요즘은 아내를 위한 공간을 고민한다. 사랑은 둘이 꼭 붙어 있어 행복할 수 있지만, 잠시 동안 멀리서 그리워해도 아름답다. 가끔은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듯 아내를 가만 놔두어도 좋다. 하지만 아내에게 그런 공간과 시간을 주려면 돈이 들어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포기하기보다 조금만 머리를 쓰자. 돈 드는 공간을 만들 수 없다면 말없이 복종하는 머슴 돌쇠가 되어보자. 남편의 잔소리와 칭얼거림이 사라지고 까닥거리는 손가락과 입만 있어도 되는 공간은 아내만의 공간이다. 그 공간에서 아내가 잠시 쉴 수 있다면, 그 시간은 남편 자격을 잠시 내려놓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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