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 초인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프리드리히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by 임동숙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마지막 장을 덮는다. 니체의 거대한 사상 체계보다 유난히 마음에 남은 것은 “위대한 정오”와 “중력의 영”이라는 문장이다. 왜 하필 이 두 구절이 이토록 오래 잔상으로 남았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나만의 정의를 한 문장 적어 보게 되었다.



영웅, 혹은 초인은 상태동사다.

일반적으로 초인이라는 단어는 누군가보다 뛰어난 사람, 어떤 경지에 도달한 사람, 끝내 자기완성에 이른 존재로 해석된다. 다시 말해 과정에 있는 ‘동사’의 의미보다 결과물인 ‘명사적 상태’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나에게 짜라투스트라는 계속해서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움직임, 다시 말해 ‘되어가는 중인 존재’처럼 느껴졌다. 도착이라기보다 통과였고, 완결이라기보다 운동이었다. 그래서 내게 영웅은 명사보다 상태동사에 더 가까워 보였다.


그렇다면 내 삶에서 중력의 영은 무엇이었을까.

나를 아래로 끌어내리고, 무겁게 만들고, 익숙한 자리로 되돌아가게 하는 힘은 무엇이었을까. 외부의 시련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쩌면 내 안의 오래된 습관,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강박, 내 몫이 아닌 것까지 품으려는 과도한 책임감, 관계를 놓치지 않으려는 불안 같은 것들이 더 큰 무게였는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성실과 책임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삶을 떠받치기보다 주저앉히는 힘이 되는 것들. 내게 중력의 영은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내 안의 낙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나는 무엇을 그토록 오래 짊어지고 살아왔을까. 낙타는 숭고한 인내의 상징으로 읽힐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한동안 분별없이 견디기만 하는 삶의 형상처럼 다가왔다. 견딘다는 것이 늘 강함을 뜻하는 것은 아닐 텐데, 나는 오래도록 견디는 일 자체를 미덕처럼 여겼던 것 같다. 어쩌면 중력의 영은 낯선 적이 아니라, 내가 오랫동안 등을 내주고 살았던 익숙한 무게였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사자는 어떤 존재였을까.

나는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 무척 힘든 사람이다. 내 삶에서 사자는 거창한 반항의 모습으로 온 적이 별로 없다. 오히려 아주 조용하고 늦게, ‘더는 모두를 만족시키며 살 수는 없다’는 자각과 함께 찾아왔다. 경계를 세운다는 것이 누군가를 밀어내는 일이 아니라, 내 삶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몸짓임을 조금씩 배우게 된 순간들. 그래서 내 안의 사자는 포효하는 짐승이라기보다, 떨리지만 끝내 삼키지 않은 한 문장의 “아니오”에 가까웠다. 나에게 사자는 파괴의 상징이라기보다, 중력의 영을 거스르기 위해 겨우 터져 나온 주권의 목소리였다.


그렇다면 어린아이는 어디에 있을까.

니체의 어린아이는 새롭게 시작하는 존재, 스스로 이름 붙이는 존재다. 나는 다시 가볍게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일까. 무엇을 증명하려는 마음 없이 무언가를 만들고, 쓰고, 바라볼 수 있을까. 그런데도 아주 드물게 그런 순간은 있었다. 어떤 이미지 앞에서 마음이 움직일 때, 오래된 바위의 표면에서 사람의 형상 같은 것이 어슴푸레 떠오를 때, 그것을 해석하기 전에 먼저 가만히 응시하게 될 때. 그런 순간만큼은 삶이 의무가 아니라 하나의 ‘열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린아이는 내게 도착한 존재라기보다, 가끔 멀리서 빛을 던지는 가능성처럼 보인다.


독수리와 뱀의 사이에서.

독수리의 시선은 삶을 멀리서 보게 한다. 왜 나는 자꾸 이미지와 신화를 통해 삶을 읽으려 하는지, 왜 한 장의 사진이 지금의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되는지 조망하게 한다. 반면 뱀은 허물을 벗는 고통을 동반한다. 익숙한 역할과 상처로 빚어진 정체성을 벗어야 하는 순간들. 나는 독수리의 눈보다 뱀의 몸에 더 자주 기대어, 아프지만 다시 벗어 나오는 과정을 반복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이쯤에서 다시 위대한 정오를 생각해 본다.

정오는 그림자가 나를 완전히 집어삼키지는 않는 시간, 삶의 무게에 눌려 납작해지지는 않는 시간이다. 잠시라도 더 밝게, 더 가볍게, 더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게 설 수 있는 순간. 니체가 말한 초인은 정오에 도착한 사람이 아니라, 정오를 향해 끊임없이 몸을 돌리는 존재일 것이다.


영웅(초인)은 삶 한가운데서 반복해서 일어나는 움직임 그 자체다.

긴 시간 이 책을 곁에 두고 읽으면서 분명해진 것은, 나는 낙타와 사자와 어린아이 사이를 오가고 있고, 독수리의 시선과 뱀의 몸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삶이 명사가 아니라 상태동사라면, 영웅 역시 고정된 형상이 아니라 계속 변하는 리듬일 테니까.


이제 책을 덮으며 니체가 남긴 질문들을 나에게 다시 던져본다.


너는 무엇을 짊어지고 있느냐.

무엇 앞에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느냐.

너 안의 어린아이는 아직 살아 있느냐.

나는 아직 충분히 답하지 못한다. 다만, 영웅은 멀리 있는 이름이 아니라 중력의 영을 거스르며 조금씩 몸을 돌리는 내 '존재의 상태'임을 믿어보려 한다.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 초인은 그런 상태동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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