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LDL 콜레스테롤이 100mg/dl 이하라도 정작 ‘ApoB‘가 높으면 동맥경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2. ‘물과 기름은 섞일 수 없다 ‘는 단순한 원리는 우리 몸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기름으로 된 세포막 덕분에 물로 된 세포질은 물로 된 조직액에 섞이지 않습니다. 기름 성분으로 된 호르몬, 코티솔은 저장이 어려워서 ’ 오마카세’처럼 주문이 들어오면 생산되는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세포막을 마음대로 넘나들며 작동했습니다. 우리 몸은 현명하게도 부피당 칼로리가 가장 많은 중성지방으로 에너지를 저축합니다. 당뇨나 지방간 등의 대사성 질환은 물로 된 혈액을 통해 기름 성분인 중성지방을 운송하려다가 생기는 문제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3. 또 다른 기름 성분, 콜레스테롤 또한 우리 몸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지금까지 다룬 내용만 꼽아봐도 콜레스테롤이 하는 일은 꽤 다양했습니다. 콜레스테롤은 안과 밖을 나누는 세포막의 구성 성분이고, 성호르몬, 코티솔, 알도스테론 등 모든 스테로이드 호르몬의 원료였으며, 우리가 먹은 지방을 녹여 흡수하게 도와주는 담즙산은 LDL 콜레스테롤을 재활용함으로써 간에서 만들어졌었습니다.
4. 콜레스테롤 저해제, 스타틴을 먹으면 치매가 생긴다는 소문도 뇌세포에서 콜레스테롤을 만드는 걸 스타틴이 방해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 비롯했습니다.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으니 걱정 마세요!) 신경세포를 만드는 데에도 콜레스톨은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콜레스테롤은 현실 세계에서 강철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강철처럼 중요한 물질을 약을 먹어서 줄이는 게 나쁘다는 주장이 꾸준히 나오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5. 하지만 문제는 간에서 도맡아 콜레스테롤을 생산하기로 결정하면서 시작됩니다. 각자 콜레스테롤을 만들어 내는 건 너무 낭비이므로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한 곳에서 몰아서 만들기로 한 것까지는 좋지만, 역시 물이 지나가는 혈관을 통해 기름을 보내준다는 게 발목을 잡는 겁니다. 게다가 구조물로 쓰일 만큼 견고하다 보니 콜레스테롤은 잘 녹지도 않아서 까딱 잘못하면 우리 혈관은 기름덩어리로 꽉 막힌 중국집 하수관처럼 변해버릴 수 있습니다. 의사들이 걱정하는 동맥경화가 바로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6. 그래서, 우리 몸에서는 콜레스테롤을 포장하는 시스템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포장재의 이름은 아포지단백(Apolipoprotein)이라고 합니다. 종류는 A부터 E까지 있는데 대부분은 B형으로 포장됩니다. (마치 캔콜라냐 병콜라냐 PET병에 담긴 콜라냐의 차이) 이왕 기름을 보내는 일이니까 중성지방과 콜레스테롤은 함께 포장되어 배송됩니다.
7. 아포지단백으로 똘똘 포장된 콜레스테롤, 중성지방을 지단백(Lipoprotein)이라고 부르고, 규격에 따라 분류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LDL, HDL, VLDL 등의 이름은 지단백의 구성 함량에 따른 분류입니다. (350mL, 1.5L, 댓 병 등) 중성지방과 콜레스테롤이 많이 담겨 있을수록 밀도는 낮아져 Low로 분류됩니다. (포장재 : 내용물 비율)
8. 간에서 갓 출하될 때의 규격은 VLDL입니다. 배송될 중성지방과 콜레스테롤이 가장 많이 포함되어 있으니 밀도가 가장 낮(Very Low)으므로 이름이 그렇게 붙었습니다. 한데 VLDL은 혈액 속에서 몇 분~몇 시간밖에 관찰되지 않습니다. 길을 나서자마자 중성지방과 콜레스테롤을 바로 내어주기 시작하고, Very를 떼내고 Low만 남아 LDL이 되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우리 몸에서 가장 많은 콜레스테롤 규격은 LDL 콜레스테롤로 지단백의 60~70%가 이 패키지로 순환합니다.
9. 그런데 아무리 포장을 잘해도 배달 사고는 일어납니다. 특히 가장 많은 규격의 LDL 콜레스테롤이 사고율도 가장 높습니다. 높은 혈압이나 흡연, 당뇨로 혈관 내피세포에 상처가 생겼을 때 하필이면 딱 알맞게, 꼼짝달싹 못하고 그대로 끼여서 문제를 일으키는 규격이 LDL 콜레스테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로 측정하고 가장 주의 깊게 보는 수치도 1dl당(부피당) 몇 mg(무게)의 LDL 콜레스테롤이 들어있냐의 수치입니다.
10. 그런데 말이죠, 어떤 환자들은 LDL 콜레스테롤을 (권고안대로) 충분히 낮췄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심근경색이나 뇌졸중 등의 심혈관 질환이 일어났습니다. 반대로 LDL 콜레스테롤이 높아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환자도 있었습니다. 과학자들은 그 차이가 어디에서 생기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11. 캐나다 맥길 대학교의 알란 스나이더만(Allan Sniderman) 박사는 이 비밀을 설명하기 위해, 단순히 혈액 1dl 중에 LDL 콜레스테롤이 몇 mg이 들어 있는지, 그러니까 부피당 무게만으로 측정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주장을 펼친 최초의 과학자입니다. 그는 같은 무게라도 LDL 분자 개수는 차이가 날 수 있으며 질병이 생기느냐 마느냐는 그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사과 1kg은 5개 정도지만, 블루베리 1kg 은 개수가 200개가 넘지 않겠습니까?
12. 그래서 박사는 LDL 콜레스테롤 분자 개수를 알아보기 위해 LDL을 담은 포장지, 즉 ApoB를 측정해 보면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LDL 분자 하나당 ApoB 포장재는 1:1로 하나씩 필요하거든요. (마치 C-peptide처럼요!)
13. 그의 가설은 연구 결과로 증명되었습니다. 관상동맥이 발병한 그룹과 문제가 없었던 그룹을 비교해 보니 가장 차이가 난 수치가 바로 ApoB 농도였습니다. 관상동맥 질환이 없는 군의 ApoB는 82 ± 22 mg/100 dl로 일반인과 차이가 없을 정도였지만, 관상동맥이 발생한 그룹의 ApoB는 118 ± 22 mg/100 dl로 훨씬 높았습니다.
14. 이후 전 세계 52개국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연구에서 ApoB/ApoA-I 비율이 LDL 콜레스테롤보다 심근경색 위험을 훨씬 더 정확하게 예측한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AMIS 연구 & INTERHEART 연구) 2010년대에 들어와 유전자 분석 기술이 발달하면서, 평생 ApoB 수치가 낮게 유지되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은 심혈관 질환에 거의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Emerging Risk Factors Collaboration (2009, JAMA)
15. 그래서 유럽심장학회(ESC/EAS)는 2019년부터 중성지방이 높거나 당뇨, 대사증후군, 비만이 있는 환자에게는 반드시 ApoB를 측정할 것을 'Class I(가장 높은 등급)'으로 권고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과 한국의 가이드라인에서도 ApoB를 공식적인 동맥경화의 위험인자로 인정하는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논의되고 있습니다.
16. 그나저나 똑같은 무게인데, 실제 LDL 콜레스테롤 분자수가 늘어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 지에 대해서 추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원래대로라면 폐기되어야 했을 LDL 콜레스테롤이 재활용되는 일이 생기면 분자수가 늘어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런 현상은 공병을 모아 그 안에다 가짜 음료수를 넣어 파는 것과 비슷합니다.
17. 당뇨나 비만과 같이 우리 몸에서 중성지방을 너무 많이 만들어 내는 상황이 되면, 쉴 새 없이 나오던 VLDL이 목적지까지 가지 않고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던 LDL를 만나 중성지방을 덥석 넘겨줘버리는 일이 생깁니다. 원래대로라면 임무를 마치고 복귀해 담즙산 등으로 재활용되어야 할 LDL들이 퇴근을 못하는 일이 생기는 겁니다. 이렇게 콜레스테롤 패키지끼리 중성지방을 주고받는 과정을 CETP반응이라고 부릅니다.
18. 이렇게 퇴근을 놓쳐버리고 다시 중성지방을 떠안은 LDL은 더 이상 원래 비율대로 중성지방 : 콜레스테롤을 담고 있지 못합니다. VLDL에서 콜레스테롤까지 넘겨받은 게 아니니까요. (가짜 콜라가 담긴 상황) 이런저런 사정이 더해지며 LDL은 더 이상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채로 혈관 속을 떠돌아다니는 비운의 운명을 맞이합니다. 간으로 복귀도 못합니다. 내구연한이 지난 패키지에다 억지로 중성지방을 담다 보니 결국 포장재가 꾸깃꾸깃 변성이 되고 크기도 작아지거든요.
19. 당뇨환자가 스타틴을 절대 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드리며, 당뇨환자의 LDL콜레스테롤은 일반인들과 달리 sdLDL(small dense, 작고 단단한, 특수부대처럼)이 많아서 훨씬 위험하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린 것 기억나시나요? 이때 sdLDL이 바로 위에서 말한 ‘블루베리처럼 쪼그라 든’, ‘원래라면 폐기되어야 했을 운명의 LDL 이 계속 재활용된’ LDL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sdLDL만 따로 측정하는 것은 꽤나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LDL을 포장하는 ApoB의 수치를 재는 방식으로 LDL의 분자수를 간접적으로 짐작하는 데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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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단순히 LDL을 포장하는 단백질로 알고 있었던 ApoB가 그 자체로 동맥경화를 유발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LDL을 타깃으로 하는 게 아니라 ApoB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콜레스레톨을 낮추는 기전의 치료제도 개발되었습니다. 신약 Mipomersen는 ApoB를 만드는 설계도(mRNA)를 파괴해 버리는 획기적인 기전으로 개발되어 큰 기대를 모았지만, 아쉽게도 국내에서는 쓸 수 없습니다. 간에 끼치는 부작용이 너무 심했거든요.
21. 고지혈증을 치료하는 새로운 신약에 대한 소개는 내일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