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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 Sep 05. 2019

타인의 부엌

결혼 후 첫 명절을 맞이하면서 나는 타인의 부엌을 아주 깊게 들어가서 찬찬히 둘러보는 경험을 처음 해 본 것 같다. 그간 내가 익숙하게 아는 부엌은 엄마가 살림하는 공간과 내가 가진 부엌이 전부였다. 며느리가 된 후 시댁을 오갈 일은 있어도 거의 식사만 하고 나오기 일쑤라 시어머님의 부엌이래도 설거지 정도까지가 가장 깊게 들어가 본 터였는데, 명절은 달랐다. 엄청난 양의 명절 음식을 제한된 손으로 정해진 시간 내에 해내려면 허투루 쓸 시간이 거의 없다. 입은 무거워지고 엉덩이와 손발이 빨라지는 경험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댁의 부엌에서 이제 막 가족이 된 사람들이 먹을 음식을 준비하며 겪어냈다. 


크게는 조리도구와 조미료, 식재료가 어디 있는지 파악해야 했고, 나아가 냉장고의 어느 칸에 어떤 음식들을 보관하시는지 알아야 신속하게 일을 할 수 있었다. 그 명절을 기점으로 나는 타인의 부엌을 샅샅이 둘러보고 깊이 들어가 보는 경험을 했다. 30년을 넘게 살면서 우리 엄마의 부엌이 전부였던 내게 이곳은 신세계이자 너무도 낯선 환경이었다. 친정에서야 엄마가 뭐 갖고 와라 하면 착착 챙길 수가 있는데 시어머님의 부엌에서 나는 전에 없던 이방인이었다. 심부름을 시켜두고도 설명이 더 길어질 기미를 보이자 부지런한 시어머님은 직접 움직이기 시작하셨고, 어찌할 바를 모르던 나는 눈치껏 움직이며 해야 할 일들을 찾았다. 


모든 이들의 생활공간이 그렇겠지만 특히나 살림을 하는 사람의 부엌은 그 주인의 많은 것을 품고 있다. 이를테면 나의 친정엄마의 경우 예쁜 그릇과 찻잔을 좋아해서 싱크대의 거의 한 칸이 각양각색의 잔들이 차지하고 있고, 조리도구 또한 엄마 특유의 색감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반대로 시어머님은 실용성을 우위에 두는 분이라 가볍고 쓰기 좋은 그릇과 도구들이 길지 않은 동선 안에 모두 배치되어 있다. 심지어 명절에 쓰는 손님용 그릇들 중 일부는 시어머님이 혼수로 해 오신 것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을땐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너무 새것 같은 그들을 관리하는 노하우는 직접 듣지 않아도 보관해 두신 모양새에서 이미 알 수 있었다.


처음 내가 시어머님의 부엌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정갈하다 였다. 부엌가구나 싱크대가 새것이거나 단순히 깨끗해서가 아니라, 구석구석 주인의 손길이 닿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집에서 꽤나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부엌에서 어디 하나 죽어있는 공간이 없었다. 그리고 아주 비싸거나 새로운 물건은 아니라도 누군가가 애정을 가지고 오래 써 온 물건들이 주는 정갈함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많이 배웠다. 물건 자체의 좋고 나쁨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에게 맞는 물건을 찾고 그것에 애정을 담아 관리하는 게 어떤 것인지 40년이 넘는 살림 인생이 녹아 있는 그 공간은 말해주고 있었다.


이제는 나도 어설프게나마 내 살림을 살아보고 나니 알 것 같다. 아무리 좋다고 소문난 브랜드의 물건도 내 조리법과 맞지 않으면 구석에 처박히기 일쑤고, 별생각 없이 샀던 기다란 나무젓가락이 수년 동안 매일 꺼내 쓰는 조리도구가 되기도 한다는 걸. 그리고 부엌이 그 주인의 취향과 삶의 모양새를 얼마나 많이 내포하고 있는지를. 타인의 부엌을 찬찬히 돌아볼 일은 살면서 사실 그리 흔치 않은 경험이다. 그래서 그 한 번에서 매우 강렬하고 많은 이야기를 얻는 것일지도 모른다. 서재나 거실도 취향을 고스란히 보여줄 수는 있지만 속속들이 보지 않아도 대략적인 가구와 색감들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면, 부엌은 다르다. 찬찬히 보고 깊숙이 보아야 알 수 있다. 


오늘도 하루에 몇 번씩 들락거리는 나의 부엌이지만 구석구석 손 닿지 않는 곳이 없도록, 어디에 뭐가 있는지 적어도 주인인 나는 기억해 두려고 애정을 담고 바라본다. 그리고 욕심을 내 본다면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서 나의 연륜이 내 부엌에서도 느껴질 즈음이 된다면, 내가 시어머님의 부엌에서 느꼈던 반짝반짝 빛나는 생동감이 느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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