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기보다 유연한 편이다. 운동신경이 아주 좋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유연성은 부족하지 않다고 자부한다. 그래서 요가나 필라테스와 같이 정적이지만 관절을 쓰고 근육을 늘릴 수 있는 운동을 좋아한다. 혼자 하는 운동의 절반 정도도 스트레칭의 강도를 조절해서 움직이는 동작들이다. 올해의 목표라면 다리 찢기인데... 이게 참 될듯 될 듯 잘 안된다. 이 정도 되면 나이 탓도 해야겠지만.
유연함이라는 것이 신체적으로 체득되는 부분도 중요하지만, 사고의 유연성이야말로 죽기 전까지 꾸준히 늘리고 유지해야 하는 중요한 포인트가 아닐까 싶다. 물론 연륜이라는 것이 쌓이면서 조금씩의 유연성은 시간의 도움을 받아 쌓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가 어느 지점에서 늘 깨어있으려 의식한다는 것이 이를 위한 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회사일을 하면서 가장 자주 느낀 점이라면, 유연한 사고를 가진 이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거창하게 유연함까지 말할 것 없이 스스로의 판단이나 생각, 결정들에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을 훨씬 더 자주 목격했다. 무오류에 대한 스스로의 강박적인 믿음과 그것을 수용하지 못하는 어른의 모습은 흡사 어느 장관 후보자의 그것과도 매우 닮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요즘이다.
친구건 가족이건 동료건 지인의 범주를 막론하고 나는 유연한 사람을 좋아한다. 돌발상황에서도 크게 당황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반대로 좋은 때가 와도 적당히 즐기고 그다음을 준비하는 의연함을 가진 사람들이 매력적이다. 이는 결국 성향의 문제라 그렇지 않은 사람이 틀렸다고 정의할 수는 없지만, 어지간해서는 유연한 사고를 가진 이와 함께 하는 편안함을 넘어서기는 힘들다. 특히나 회사라는 조직은 직급과 연차, 나이에 따라 구분이 확실해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보유한 정보량은 늘어나지만 유연성은 줄어들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진다. 이런 현실에서 정보량에 비례하는 유연성을 가진 임원 또는 선임들의 의사결정은 독보적일 수밖에 없다.
생각의 한계를 정해두지 않되 상식선에서의 가치 기준을 중심에 세우고 어쩌고 저쩌고.... 유연하게 사고하기란 글로 정의되는 내용만큼 모호한게 사실이다. 실생활에서 가장 빠르게 유연해질 수 있는 비법(?)이라면 '경청'정도가 아닐까. 이게 꽤나 쉽게 들리지만 막상 해보려면 무척이나 심혈을 기울여야 가능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상대방의 말을 중간에 자르지 않고, 나와 의견이 조금 달라도 끝까지 듣는 것. 듣고 난 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까지 뻗어나가는 데는 분명 훈련과 연습이 필요하다. 그리고 가끔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고 있자면 슬슬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오기도 한다. 하지만 어떠한 사회현상에 딱 맞아떨어지는 정답은 없으므로, 많이 듣고 내 것과 엮어 생각하고 그다음으로 나아갈 사고의 바탕을 다양하게 채워두는 것은 세상을 조금씩 더 살아가며 분명히 갖춰야 할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유연함은 생각보다 사소한 것에서 묻어난다. 걸음걸이와 손짓, 눈빛과 억양 그리고 뒷모습. 강하다거나 고집이 세다거나 하는 특징들처럼 한눈에 또는 한 마디에 그 특징을 알아차릴 수 있는 것들과는 조금 다르게, 유연함은 숨겨져 있는 것 같지만 결국엔 많은 것들이 이를 보여줘 버리는 작지만 신기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잃지 않음이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는지도 분명하다.
다리를 자유자재로 찢을 수 있을 만큼의 유연성을 기르자면 매일 꾸준해야 한다. 며칠이라도 게을렀다간 다시 예전 딱 그만큼만 벌어지는 다리의 각도를 보면서 새삼 유연하게 사고한다는 것이 이보다 어렵지 쉬우랴 하는 교훈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