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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 Oct 28. 2019

강아지와 나

집에서 반려견을 키우기 전까지만 해도 강아지는 가까이해 본 적이 없어서 늘 무섭기만 했다. 내가 대학을 입학하고 부산에서 살던 집을 떠나던 해, 딸 셋이 사라진 집이 적적하실 부모님을 생각해서 강아지 한 마리를 집에 들였다. '예'자 돌림의 세 자매 이름을 따서 이름도 '예둥이'로 짓고 우리는 한 식구가 됐다. 강아지를 키워본 적 없던 우리에게 예둥이는 사고뭉치 그 자체였지만, 윤기 넘치던 갈색의 그 작은 강아지는 미워하기에는 귀여운 구석이 너무 많아 그저 웃어 넘기기 일쑤였다. 내가 누군지도 모를 텐데 처음 나를 만나던 둥이는 꼬리가 떨어져라 엉덩이를 흔들어댔고, 처음 본 순간부터 나는 예둥이가 좋았다.


견생은 인생보다 무척 짧아서 이제는 떠나고 없지만, 예둥이는 살면서 새끼도 낳고 이사도 이리저리 다니며 다난한 생을 살았다. 중형견에 속해서 작은 집이 답답했을 텐데도 예둥이는 항상 가족들을 반겼고, 남겨진 집이 무서우면 집이 떠나가라 짖어대는 통에 민원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둥이는 밉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개가 그렇겠지만, 쓰레기 버리러 잠시 나갔다 들어와도 한결같이 궁둥이를 흔들며 사람을 반기는 예둥이는 영리하고 자기 색깔이 뚜렷한 내 동생이었다. 목욕은 너무 싫어하지만 백사장에서 갈매기를 쫒다가 물속에 들어가 버리기도 했고, 산책하다 길을 잃고는 우리 집과 똑같이 생긴 옆 동 아파트의 9층에 올라가 주인을 기다리기도 했다.


반려견을 키우고 한참이 지나서야 내가 강아지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키우던 강아지들을 떠나보내고 난 후, 예둥이와 같은 견종의 개가 지나가면 한참을 서서 바라본다. 개와 함께 사는 인생에는 해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소소한 감동이 있다. 동물과 교감한다는 것의 실체를 경험하고 나면 주인과 반려견의 관계를 너머 친구가 되는 어떤 순간이 온다. 내가 기쁘면 함께 즐거워하고, 우울에 지쳐 울면 곁에서 눈물을 핥아주는 반려견을 만나는 경험은 말이나 글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감동이다.


강아지와 함께하는 나는 여전히 무뚝뚝하고 말수 적은 나라서 곰살맞게 놀아주고 무한한 애정을 표현해 주지는 못한다. 그저 다가오면 몸 구석구석을 만져주거나 강아지 손이 닿지 않는 곳을 긁어주는 정도가 전부고, 배변판을 치우거나 밥통을 채워주는 정도가 내가 해 준다는 것의 대부분이다. 장난감을 가져와 놀아달라고 하면 던져주고 가져오면 대수롭지 않은 칭찬을 해 주는 게 전부인 나인데도, 예둥이는 대충 던져주는 내가 미안할 정도로 즐거워했고 착실하게 장난감을 되가져왔다. 강아지와 함께하는 삶에서 꽤나 신선했던 경험은 내가 얼마를 내어 주어도 한결같이 자신의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 내어 주는 실체를 눈으로 확인하던 그 짧은 놀이의 순간들이었다.


각별했던 첫 반려견이 떠나고 이제는 큰언니와 부모님이 키우시는 강아지들을 가끔 만난다. 나는 그들에게 객일 뿐이고 또 언젠가는 사라질 누군가지만, 그들은 역시나 내게 무한한 애정과 반가움을 한결같이 전한다. 나 또한 그들에게 둥이한테 그랬던 것과 비슷한 정도의 손길과 뒤치다꺼리를 해 주는 게 전부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눈빛을 나누고 교감한다. 서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며 내 가족의 반려견으로 만나게 된 우리의 인연을 생각하며 나는 그들을 쓰다듬는다. 만져주는 손길이 싫지 않은지 그들은 금세 배를 내어주고 곁에 한동안 머물다 자기 자리로 돌아가곤 한다.


둥이가 떠나고 멀리서 혼자 마음속으로 인사를 전했다. 다음 생이라는 것이 있다면 어떠한 관계로든지 너와 꼭  다시 만나고 싶으니 그때까지 아프지 않게 잘 지내고 있어 달라고. 세월이 흘러 예둥이를 떠올리는 시간의 간격이 뜸해지기는 했지만, 이름만 생각해도 어느새 눈물이 먼저 차오르는 예둥이는 평생 잊지 못할 나의 소중한 반려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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