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1940년 12월 윤동주)
사실 윤동주의 첫 시집이자 유고 시집이 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원제는 이 시 제목처럼 '병원'이었다고 한다. 윤동주의 사후에 고이 보관해 왔던 시들을 모아 세상에 내놓은 지인 정병욱은 당시의 그의 말을 이렇게 회상했다고 한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 인지 후에 시집의 제목은 우리가 익히 아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되어 출간되었다. (내가 홀로 추측해 보건대, 윤동주 시인은 아마도 처음에는 <병원>이라는 제목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마지막으로 '서시'를 쓰면서 책 제목을 바꾸지 않았을까 생각을 한다. 책 제목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서시의 핵심 단어들을 나열해 놓은 단어들이기 때문이다. 즉, 책의 제목은 서시의 키워드만 뽑아서 나열한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병원이다. 지금은 어디가 가장 아픈 곳일까? 지금은 우리들의 어머니인 지구가 가장 아픈 병원이다. 윤동주 시인이 지금, 우리 시대에 우리들과 함께 살아있다면 아마도 아픈 지구를 먼저 노래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늙은 의사는 아직도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옛날에는 사람만 병들고 자연은 건강했지만 이제는 사람들 때문에 자연까지 병이 들었다. 이제는 사람과 지구를 함께 구해야만 한다."
1. 정방폭포 윤동주를 읽는다
2. 정방폭포가 윤동주를 읽는다
3. 윤동주가 정방폭포를 읽는다
4·3과 평화가 정방폭포를 찾아간다
정방폭포는 윤동주를 읽고 있다
검은 주상절리의 서랍을 열어본다
새하얀 무명천이 하늘에서 끝없이 내려온다
무명천 할머니께서 수의를 만들고 계시는지
만가(輓歌)처럼 베 짜는 소리도 함께 들린다
주상절리 서랍에서 흑백사진 한 장 꺼낸다
수용소로 사용되었던 전분공장과 창고들이 보이고
멀리, 목호(牧胡)들의 범섬까지 뚜렷하게 보인다
물빛과 무명천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하얗고
발을 담그고 세수도 하였을 것만 같은 여울물소리
더 이상 발을 디딜 수 없는 노래는 비명(悲鳴)이 된다
길을 잃고 느닷없이 단애(斷崖) 아래로 떨어진 사람들
서귀, 중문, 남원, 안덕, 대정, 표선, 한라산 남쪽 사람들
태평양을 헤매다가 75년 만에 작은 집으로 돌아온다
불로초 공원에 만든 그 작은 공간으로 돌아오는 영혼들
타고난 제 삶도 끝까지 살지 못하고 벼락처럼 떠나버린
그 많은 정방폭포의 사람들
광풍에 느닷없이 길이 끊어져 허공에 발을 딛고
한꺼번에 바다로 추락해 버린 목숨들, 오늘도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바다에서 길을 찾고 있는 사람들
그중의 한 사람을 따라서 긴 순례를 다시 시작한다
윤동주를 읽던 정방폭포가 젖은 몸으로 따라나선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 11. 20. 윤동주)
정방폭포는 한라산 남쪽 최대의 학살터였다. 75년 만인 2023년 5월에 비로소 서복 불로초 공원 한쪽에 작은 4·3 희생자 위령공간이 마련되었다.
정방폭포에서 베틀소리가 들린다. 정방폭포에서 만가(輓歌) 소리도 들린다. 정방폭포에서 아우성소리가 들린다. 정방폭포에서 자장가소리도 들린다. 정방폭포에서 원자폭탄 떨어지는 소리도 들린다. 일본이 항복하는 소리도 들린다.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일장기 대신 성조기가 올라가는 모습이 보인다.
왜 제주도의 폭포는 남쪽에만 있을까? 자세히 살펴보니, 북쪽의 폭포들은 낮은 포복으로 기어 오고 있었다. 윤동주 시인이 요즘 시인이라면 어떤 시를 쓰고 있을까? 나는 윤동주 시인을 생각하며 나의 꿈과 나의 삶과 나의 문학을 처음부터 다시 한번 점검하며 순례를 떠난다. 윤동주의 거울 하나 들고서 순례를 다시 시작한다.
"하늘을 보지 못해서 부끄럼이 너무 많다. 나는 지금껏 죽어가는 것들을 얼마나 사랑했을까? 나는 지금껏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했을까? 나는 이제라도, 나한테 주어진 길이 아니라,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길을 찾아서 걸어가고 싶다. 오늘 밤에도 나의 별들은 잠들지 못하고 추위에 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