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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Jun 20. 2024

윤동주 시인과 함께

― 0004 오늘이 나의 마지막인 것처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윤동주 시인과 함께





0000 프로필


서른 살까지 사는 것이 꿈이었다. 왼쪽 가슴이 아팠다. 남몰래 가슴을 안고 쓰러지는 들풀이었다. 내려다보는 별들의 눈빛도 함께 붉어졌다. 어머니는 보름달을 이고 징검다리 건너오셨고, 아버지는 평생 구들장만 짊어지셨다. 달맞이꽃을 따라 가출을 하였다. 선천성 심장병은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나의 비밀은 첫 시집이 나오고서야 들통이 났다. 사랑하면 죽는다는 비후성 심근증, 심장병과 25년 만에 첫 이별을 하였다. 그러나 더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바다는 나를 이어도까지 실어다 주었다. 30년 넘게 섬에서 이어도가 되어 홀로 깊이 살았다. 나는 이제 겨우 돌아왔다. 섬에서 꿈꾼 것들을 풀어놓는다. 꿈속의 삶을 이 지상으로 옮겨놓는다. 나에게는 꿈도 삶이고 삶도 꿈이다. <꿈삶글>은 하나다. 윤동주 시인을 다시 만나 함께 길을 찾는다.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함께 마지막 순례를 떠난다.


0001 윤동주 시인


일제강점기에 짧게 살다 간 젊은 시인으로,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고민하는 철인이었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그의 얼마 되지 않는 시 속에 반영되어 있다. 만주 북간도의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으며, 기독교인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아버지는 윤영석(尹永錫), 어머니는 김룡(金龍)이다. 


1931년(14세)에 명동(明東) 소학교를 졸업하고, 한 때 중국인 관립학교인 대랍자(大拉子) 학교를 다니다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자 용정에 있는 은진(恩眞) 중학교에 입학하였다(1933). 1935년에 평양의 숭실(崇實) 중학교로 전학하였으나, 학교에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폐쇄당하고 말았다. 다시 용정에 있는 광명(光明) 학원의 중학부로 편입하여 거기서 졸업하였다. 1941년에는 서울의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릿쿄[立敎]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1942), 다시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옮겼다(1942). 


학업 도중 귀향하려던 시점에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1943. 7),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러나 복역 중 건강이 악화되어 1945년 2월에 생을 마치고 말았다.


유해는 그의 고향 용정(龍井)에 묻혔다. 한편,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은 결과이며, 이는 일제의 생체실험의 일환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하고 말았으나, 그의 생은 인생과 조국의 아픔에 고뇌하는 심오한 시인이었다. 그의 동생 윤일주(尹一柱)와 당숙인 윤영춘(尹永春)도 시인이었다. 


그의 시집은 본인이 직접 발간하지 못하고, 그의 사후 동료나 후배들에 의해 간행되었다. 그의 초간 시집은 하숙집 친구로 함께 지냈던 정병욱(鄭炳昱)이 자필본을 보관하고 있다가 발간하였고, 초간 시집에는 그의 친구 시인인 유령(柳玲)이 추모시를 선사하였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첫 작품으로 <삶과 죽음> , <초한대>를 썼다. 발표 작품으로는 만주의 연길(延吉)에서 발간된 《가톨릭 소년(少年)》지에 실린 동시 <병아리>(1936. 11), <빗자루>(1936. 12), <오줌싸개 지도>(1937. 1), <무얼 먹구사나>(1937. 3), <거짓부리>(1937. 10) 등이 있다. 연희전문학교에 다닐 때에는 《조선일보》에 발표한 산문 <달을 쏘다>, 교지 《문우(文友)》지에 게재된 <자화상>, <새로운 길>이 있다. 그리고 그의 유작(遺作)인 <쉽게 씌어진 시>가 사후에 《경향신문》에 게재되기도 하였다(1946).  


그의 절정기에 쓰인 작품들이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발간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의 자필 유작 3부와 다른 작품들을 모아 친구 정병욱과 동생 윤일주에 의해 사후에 그의 뜻대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정음사(正音社)에서 출간되었다(1948). 


그의 짧은 생애에 쓰인 시는 어린 청소년기의 시와 성년이 된 후의 후기 시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청소년기에 쓴 시는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으면서 대체로 유년기적 평화를 지향하는 현실 분위기의 시가 많다. <겨울> <버선본> <조개껍질> <햇빛 바람> 등이 이에 속한다. 후기인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쓴 시는 성인으로서 자아성찰의 철학적 감각이 강하고, 한편 일제 강점기의 민족의 암울한 역사성을 담은 깊이 있는 시가 대종을 이룬다. <서시>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쉽게 씌어진 시> 등이 대표적인 그의 후기 작품이다. 


그의 시비가 연세대학교 교정에 세워졌다(1968). 윤동주(尹東柱) 탄생 백주년을 넘기면서 많은 자료들과 영화 등을 통하여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졌다.


0002 못다 부른 노래


못다 부른 노래가 있다. 아직도 못다 부른 노래가 있다. 꿈속에서도 못다 부른 노래가 있다. 꿈결에도 노랫소리가 들린다. <여수 블루스> 노랫소리 들린다. <산동애가> 노랫소리가 구슬프게 들린다. <부용산> 노랫소리 들린다. <맹서 하는 깃발> 노랫소리 들린다. 장사익 선생님의 <꽃구경> 노랫소리 들린다. 


<웡이자랑> 자장가소리 들린다. 자랑자랑 자랑자랑 자랑자랑, 웡이자랑 웡이자랑 자랑자랑 웡이자랑, 우리 아긴 자는 소리, 놈의 아긴 우는 소리로고나, 웡이자랑 웡이자랑 웡이자랑 웡이 웡이 웡이자랑..., <이어도 사나> 뱃노래가 들려온다.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처어라 처어 쳐라 쳐, 젓구나 가고 젓구나 가고, 쉬고나 가자 쉬고나 가자, 쳐라 쳐 쳐라 쳐, 차라 차 차라 차,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한짝 손에 한짝 손에, 테왁을 메고 테왁을 메고, 한짝 손에 한짝 손에, 비창을 들라 비창을 쥘라, 칠성판을 칠성판을, 등에다 지고 등에다 지고,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산동애가> 사연을 들으며 나는 윤동주 시인을 읽기 시작한다. <부용산> 사연을 들으며 윤동주 시인은 나를 읽기 시작한다.


산동애가 / 열아홉 살 백순례가 오빠 대신 끌려가 죽으면서 불렀다는 노래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열아홉 꽃봉오리 피워보지 못하고

까마귀 우는 골을 멍든 다리 절어 절어

달비 머리 풀어 얹고 원한의 넋이 되어

노고단 골짝에서 이름 없이 스러졌네.


살기 좋은 산동마을 인심도 좋아.

열아홉 꽃봉오리 피워보지도 못하고

까마귀 우는 골에 나는 간다.

노고단 화엄사 종소리야

너 만은 너 만은 영원토록 울어다오.


잘 있거라 산동아 산을 안고 나는 간다.

산수유 꽃잎마다 설운 정을 맺어놓고

회오리 찬바람에 부모효성 다 못하고

발길마다 눈물지며 꽃처럼 떨어져서

나 혼자 총소리에 이름 없이 스러졌네.

  

* <산동애가> 노랫말은 전북 경찰 정성수가 썼다고 한다. 그는 산동에서 경찰로 근무하며 들은 이야기를 참고 삼아서 나중에 노랫말을 쓰고 작곡을 하여 노래를 불렀고 정식 음반까지 냈다고 한다. 


산동애가 / 이효정 가수가 약간 변형해서 부른 노래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열아홉 꽃봉오리 열아홉 꽃봉오리

피워 보지 못한 채로

화엄사 종소리에 병든 다리 절며 절며

달비 머리 풀어 얹고 원한의 넋이 되어

노고단 골짜기에 이름 없이 쓰러졌네

살기 좋은 산동마을 인심도 좋아

산수유 꽃잎마다 설운 정을 맺어 놓고

열아홉 꽃봉오리 피기도 전에

까마귀 우는 곳에 나는 간다.

지리산 노고단아 화엄사 종소리야

너만은 너만은 영원토록 울어다오.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산수유 꽃잎마다 산수유 꽃잎마다

설운 정을 맺어 놓고

회오리 찬바람에 부모 효성 다 못하고

발길마다 눈물지며 꽃처럼 떨어져서

지리산 골짝에 한을 안고 쓰러졌네

회오리 찬바람에 부모 효성 다 못하고

발길마다 눈물지며 꽃처럼 떨어져서

지리산 골짜기에 한을 안고 쓰러졌네


부용산 / 일찍 죽은 여동생을 부용산에 묻고 지은 오빠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제망매가(祭亡妹歌)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 (1절 전문)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은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 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 (2절 전문) 


세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1절 나온 지 53년 만에 2절이 태어났다.

*

부용산” 연꽃 모양을 닮은 ‘부용’이라는 산 이름은 전국에 걸쳐서 여러 군데 있다. 《부용산》이라는 작품의 부용산은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 있는 해발 95m 조그마한 산의 이름이다.


“부용산” 시를 쓴 주인공 박기동(1917-2004)은 여수 돌산 태생으로 그의 나이 10세 때 벌교로 이사 와서 살게 되었다. 본디 박기동 시인은 순천 사범학교에 재직 중이던 1947년에, 친누이 박영애가 24살의 꽃다운 아까운 나이로 폐결핵에 걸려 사망하자, 박영애 시댁 식구 몇 명과 함께 친정 부모님은 슬픔을 견디지 못해 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차마 보기 어려워 참석 못하고 부용산 중턱에 그를 묻고 유난히 푸른 하늘색 부용산 오리 길을 걸어 내려오면서 인생 무상함에 휘청거리며 가슴 저미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왜 푸른 잔디처럼 푸르게 살지 못하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너는 가고 말았구나!’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골수 깊이 파고 들어가는 비통한 상처 오빠의 애절한 심정을 시로 만든 제망매가! <祭亡妹歌>


빼어난 미모 그리고 착하기 그지없는 데다 아이마저 갖지 못하고 떠나버린 누이의 가슴에 저며드는 애달픈 시가 노래로 탄생된 것은 이듬해(1948) 목포 항도여중(현 목포여고의 전신) 국어 교사로 부임하면서 시인은 운명적으로 음악교사인 안성현을 만나게 된다.


안성현은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김소월 작사)》 만든 작곡가로 나주 남평 태생이다. 동경 음악학교 나온 성악가이자 작곡가였다.


서랍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작품에다 곡을 지어 붙여 《부용산》이라는 노래가 기구한 운명 속에 탄생되었던 것이다.


항도여중으로 부임한 시인은 누이를 잃은 아픔이 채 가시지 않은 채 또 다른 애제자 문학소녀 김정희를 만나게 된다.


경성 사범학교를 입학했던 수재 김정희는 상경하여 유학하다가 건강문제로 항도여중으로 전학해 와 학교생활 중 폐결핵으로 열일곱 나이로 요절했다(1948. 10. 1)


문학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인 그녀는 《감화원 설계》라는 글로 전국 글짓기대회 대상을 수상할 정도로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난 수재이며 미모를 가진 학생이다.


우리나라에 감화원이 제일 처음 설립된 시기는 1923년 12월 5일 함경남도 원산 송전만 지역에 조선최초의 사회시설 그 후 20여 년 동안 원산의 감화원이 국내 유일의 소년 범죄자들의 재활교육시설이었고 1937년 전남도서 연안 중에 최종적으로 감화원 부지로 선정된 곳이 바로 고하도였다.


현재 감화원 터는 공생 재활원(1984년 생긴 사회복지 법인) 재활 위한 복지시설로 사용되고 있다.


미소녀 김정희는 노령산맥 마지막 봉우리 호남의 명산 목포의 한과 꿈이 어우러진 유달산에 자주 올라갔다. 다도해의 전경 해안의 풍경 멀리 오가는 선박들을 바라보면서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자신의 건강과 운명을 생각했을까?


저 유달산 앞바다 천연 방파제 구실을 한 고하도를 바라보며 그 고하도 끝자락에 위치한 감화원에 수용되어 있는 감화원생들을 생각하면서 감화원 설계라는 글을 지었던 것이다.


누이의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 설상가상 또 다른 애제자가 요절하게 되자, 본인은 물론 전교생이 슬퍼하였으며 그 슬픔의 작품에 음악교사 안성현 곡으로 세상에 탄생한다.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 (1절 전문)


낮고 느리되 그윽하게 시작된 이 노래는 중간의 ‘너만 가고 말았구나’에서 설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너무나 아리따운 나이에 결핵으로 이승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누이와 애제자에 대한 사랑을 표출한 시적 가사라!


김정희 학생 죽음을 추모하면서 불리어진 이 가슴 저미는 노래 《부용산》은 1948년 10월 목포극장에서 열린 항도여중 예술제 배금순 학생의 노래 발표로 학교 교정을 넘어 목포를 비롯 인근 지역 남도에 들불처럼 빠르게 전파되어 잔잔한 멜로디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면서 널리 애창되었다.


젊어서 죽은 누이동생을 애도한 시가 애제자이던 소녀의 죽음을 추모한 곡으로 변한 이 노래 《부용산》은 그동안 작자 미상의 구전가요로 알려지다 보니 노래에 얽힌 여러 가지 사연과 추측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어지러운 시절 지은이마저 모르고 가사와 곡이 제각각 입을 따라 유행했다. 과거 빨치산들, 운동권 계층에서 즐겨 부르던 인기곡.


최근 몇 년 사이 노래 원본이 발견되고 실제 작사가 박기동 선생의 소식이 알려지게 되어 부활의 노래가 되었던 것이다. 1998년 봄 한국일보 김성우 칼럼 등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역사무대에 새롭게 등장하기까지 아픈 사연이 많았었다.


불행했던 한국 현대사에 매몰돼 금지곡 아닌 금지곡으로 공개적으로 부르지 못하고 진흙 속에 묻어두어야만 했던 노래. 애절한 사연만큼 구구절절 여순사건이 터지면서 산으로 간 빨치산들,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던 불안한 생활을 하면서 떠나온 고향마을 가족 생각, 애절한 마음으로 부용산을 불렀던 빨치산 주제가?


실제로 남부군 일원이 자신의 처지가 애처롭고 비참하게 죽어간 동지들이 불쌍해서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노래 불렀다는 증언이 있다


그 후 80년대는 운동권 학생들 민주투사들의 비밀스러운 애창곡이 되었다.


중요한 것은 작곡가 안성현 선생님은 육이오 동란에 스스로 월북해 버려 사상적으로 문제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 문제로 동료 박기동 교사, 조희관 교장 선생님을 퇴직시키고 말았다. 작사자는 한의사였던 부친 덕으로 일본유학 관서대학 영문학 수학 청소년기 장년기 교편생활 중 발표한 부용산이 영욕을 겪으며 수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부용산 계기로 박기동 선생님의 외롭고 고단한 삶이 노년기까지 이어지는 쓸쓸한 인생 여정의 서막이 예고되었던 것이다.


순수한 누이에 대한 정을 읊은 부용산으로 인하여 좌경으로 의심받은 나머지 50년대 말 교직을 물러나 직업 없이 국내를 전전하였으며, 1980년 부인(문행자 여사)마저 잃고 낭인의 나날을 보내게 됐다.


1967년 목포 사범 국어교사 교직을 떠나 1961년 서울로 이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가시밭길 걸어야 했고 80년대에도 늘 감시받고 가택수색, 연행, 구금당한 세월, 좌경 시인으로 몰려 한평생 떠돌아야 했던 것이다.


결국 혈혈단신 이역만리 호주(1993년)로 떠나 시드니 근교 난민촌 마운틴산에 정부 보조금으로 비좁은 7평 아파트를 보금자리 삼아 살다가 수년 전 서울로 돌아와서 병원에 몸져누운 채 88세 미수로 한 서린 육신의 삶, 생을 마감하고 경기도 마석 모란 공원 아내 옆에 오랜 유랑을 마치고 심신을 쉬고 안식하고 있다. 중앙 문단에는 이름을 올리지 않은 채 한반도 한 자락에서 반세기 넘게 시단 활동해온 남도의 불행한 서정시인 박기동!


연극인 김성옥 씨의 꾸준한 노력 덕분이랄까.

어쨌든 오랜 세월 이 노래의 탄생 배경을 알아보고 호주로 건너가 박기동 시인을 만났다. 그리고 2절을 부탁했다.


세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1절 나온 지 53년 만에 2절이 태어났다.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은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 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 (2절 전문)


이전의 가사가 누이에 대한 애달픔을 읊은데 비해 새 가사는 자신의 초연한 서글픔을 드러낸 요소가 물씬 풍긴다. 해외에 나가 살면서 더욱 간절해진 조국의 하늘과 땅에 맺힌 남매의 애틋한 마음의 절정이라 할까!


고독 맨 밑바닥까지 내려가야 생의 한 자락 엿볼 수 있는 것처럼.

강산이 다섯 번 바뀐 세월 동안 그늘에 숨겨져 오던 부용산!

지난 세기말 새롭게 부활되었다. 50년 동안 초야에 굴러다니면서도 시들지 않고 널리 확산되었던 것이다.

작가 박기동 시인은 2절 작품을 만들고, 지난날 회한이 한꺼번에 밀려와 참을 수 없어 30분가량 그냥 엎드려 울었다 한다.


“부용산” 몇몇 뜻있는 분들은 목포에서 태어나 명맥을 이어온 이 노래의 한을 풀어 주기로 했다.


96년 5월 29일 목포 부용산 음악제! 소프라노 송광선(한국종합예술학교 교수) 부르고 2절 가사가 처음 공개되었다. 2절 역시 가사만큼 가슴 저리게 불러 청중의 눈시울을 뜨겁게 적셨다. 2002년에는 부용산이라는 이름으로 산문집을 발간, 박기동 선생님은 5월 20일 잠시 귀국하여 목포에서 조촐한 출판 기념회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 본인이 직접 부용산이라는 시 낭독을 하기도 하였다.


시집 한 권 내지 못한 안타까운 70년 동안 시만 생각하고 살았으면서도 번번이 원고 압수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함은 실로 안타까움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유작 시구가 “내가 태어나도 참 좋은 나라”, “다시 태어나도 한국에 살고 싶다” 유언으로 다가와 심금을 울린다. 그는 이 노래를 지켜왔고 부활시켰던 목포, 벌교 사람들 것이라 했다.


월북 작곡가 안성현(安成絃 1920. 7. 13 - 2006. 4. 25)은 목포 항도 여중 사택에서 혼자 하숙하며 그 집 피아노로 작곡했다는 그는 무용가 최승희 남편 안막의 조카로 알려져 있으며, 아내를 홀로 두고 끝내 월북하였다. 우리나라 근대 음악사에 선구적 업적을 남긴 월북 작곡가라는 비운의 삶을 살다 간 안타까운 음악가로서 1920년대 일제 강점기에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는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불어넣고 해방과 평화를 갈망한 노래로 알려져 있으며, 지금까지도 널리 불리고 있다. 2006년 4월 86세로 타계했으며, 유족으로는 성동월(86) 미망인과 딸이 살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로 60년 전부터 목포지역에서 유행하던 이 노래


요즘도 호남 남도 지역 출신 노년층 동창생들 회식자리 추억의 향토노래로 합창되고 있으며 이는 서편제의 가락에서처럼 원초적인 남도의 사랑과 정한의 강물이 여울져 흐른다. 가수 안치환, 이동원에 의해 무대에서 새롭게 불려지고 음반도 출판되었다.


부용산이라는 노래가 유행하게 된 모태가 된 두 지역 벌교, 목포는 부용산 음악회를 개최하는 등 노력으로 대중 곁으로 새롭게 부활의 노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부활의 노래 부용산의 진원지였던 목포여고는 1949년 안성현 곡, “봄바람”으로 합창 경연대회 전국 최고상 수상 경력이라는 전통의 맥이 흘러와 지금도 합창대회 전국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화려한 경력이 증명해주고 있지 않는가!


또한 현 이기봉 교장 선생님의 특히 항도여중 맥 찾기 운동을 추진하여 당시 전국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3대 조희관 교장 선생님의 교육 철학을 본보기 삼아 64년 전통 찾기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으며, 특히 교내에 문학관을 만들어 문학의 산실로 교육의 장으로 활용, 학교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하여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고 있어 지역에 그리고 교육계에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작사자 고향 1999년 가을 벌교 현지 부용산에 < 부용산 > 시비가 건립되었고, 2002년 봄에는 작곡의 본산지 목포여고 교정에 ( 부용산 ) 노래비가 세워져 무상한 세월을 지켜나가고 있다.


또한 월북 작곡가 안성현의 고향 나주 남평 드들강변에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2009년 5월 22일 “그들은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안성현을 기리는 추모 음악회가 처음으로 나주 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리기도 했다. 노래가 탄생된 배경의 중심에 섰던 학교 사랑에 각별했다던 당시 항도여중 조희관 교장 선생님을 기념하는 “문학비”가 현 목포여자고등학교 이기봉 교장 선생님의 관심과 노력으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갓바위 문화타운 목포 문학관 앞에 세워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모든 이의 귀감이 될뿐더러 목포를 빛낸 100名중 한 사람으로 남도 문학의 숨은 별로 한글사랑과 수필가로 지역교육에 헌신한 교육자로 선정되어 유달산 예술 공원에 공적이 새겨져 있다. 실로 관심 있는 분들로 인하여 수난과 역사 속에 잊혔던 부용산 노래는 시인의 끈끈한 삶과 시 그리고 음악이 어우러진 삼위일체 작품으로 되살아난 부활의 작품, 부활의 노래로 역사성 있고 의미 짙은 국민가요로 아픔의 분단시대 남북한 문학과 음악이 어우러진 통일을 염원한 노래가 새롭게 또 다른 부활을 꿈꾸어 본다  * 부용산 가장 슬픈 부활의 연가 / 해설사 조대형


이어도 사나 / 여러 버전 중의 하나


이엿사나 이여도사나 이엿사나 이여도사나

우리 배는 잘도 간다

솔솔 가는 건 소나무 배요 잘잘 가는 건 잣나무 배요

어서 가자 어서어서 목적지에 들어나 가자

우리 인생 한번 죽어지면 다시 환생을 못하느니라

원의 아들아 원 자랑 마라 신의 아들은 신 자랑 마라

홑베개를 베고 혼자 잠자는 원도 신도 두렵지 않다.

원수님은 외나무다리 길은 무슨 큰길이던가

원수님이 길 막지 마라 사랑 원수는 아니로다.

낙락장송 늘어진 가지 홀로 앉아 우는 새야

내 님 죽은 영혼인가 나를 보면 자꾸만 운다

시집살이 삼 년 첩살이 삼 년 몇 삼 년을 살았다마는

열두 폭의 도당치마가 눈물로 다 젖었도다.

임아 임아 정한 말을 하여라. 절구 뒤 절구공이로 알마.

임이 없어도 밤이 새더라 닭이 없어도 밤이 새더라

임과 닭은 없어도 산다.

밤에 가고 밤에 온 손님 어느 고을 누구인 줄 알리오.

저기 문 앞 푸른 버드나무에 이름 성명 써 두고 가소

만조백관이 오시는 길에는 말 발에도 향기가 난다

무적상놈 지나는 길에는 길에서조차 누린내 난다

강남을 가도 돌아 나오고 서울을 가도 돌아 나온다

황천길은 아침 한나절 거리지만 한번 가면 다시 올 줄 몰라.

강남 바다에서 비 지어 오면 제주 바다에 배 띄우지 마라

명지 바다에 실바람 불면 부모의 넋이 돌아나 오게  


웡이자랑 / 여러 버전 중의 하나


웡이 자랑자랑 웡이 자랑자랑 웡이 자랑자랑 웡이 자랑자랑 저래가는 검둥개야이리오는 검둥개야 우리 아기 재와도라 너네 애기 재와주마 웡이 자랑자랑 웡이 자랑자랑 우리 아기 잘도 잔다 자랑자랑 웡이자랑 아니 아니 재와 주니 질긴 질긴 촘대로 손모가지발모가지 걸려 매고 걸려 매여 깊은 깊은 천지 속에 비 온 날은 들이치고 날 좋은 날은 내 칠기여 자랑자랑 웡이자랑 일가방상화목동이 어서 자랑 부모에게 소신동이 어서 자랑 동숭에게 우애동이 어서 자랑 어서 자랑 웡이 자랑자랑 웡이 자랑자랑 웡이 자랑자랑 웡이 자랑자랑 우리 아기 잘도 잔다 자랑자랑 웡이자랑 어서 점점 쌀밥 먹어 돈잠자라 혼정저녁 허여 사할 거 아니냐 했는다 지엄 시네 무사히영저드람시니 무사히영저드람시니


산동애가 유래


산동애가는 여순사건 때

구례군 산동면 상관마을에 

사는 백부전 열아홉 살 처녀가

부역혐의로 끌려가면서

구슬프게 불렀던 노래다.


산동면에서 부자였던 백 씨 집안은

5남매를 두었으나

큰아들과 둘째 아들은 일제 징용과

여순사건으로 희생되고

셋째 아들마저 쫓기게 되자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오빠 대신 끌려가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죽게 된다. 

     

<따뜻한 봄날> 김형영 / 장사익의 가슴을 치는 노래 <꽃구경>


어머니, 꽃구경 가요

제 등에 업히어 꽃구경 가요.

세상이 온통 꽃 핀 봄날

어머니 좋아라고

아들 등에 업혔네.

마을을 지나고

들을 지나고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짙어지자

아이구머니나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었네.

봄구경 꽃구경 눈 감아버리더니

한 움큼 한 움큼 솔잎을 따서

가는 길바닥에 뿌리며 가네.

어머니, 지금 뭐 하시나요.

꽃구경은 안 하시고 뭐 하시나요.

솔잎은 뿌려서 뭐 하시나요.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너 혼자 돌아갈 길 걱정이구나

산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


* 김형영(1945, 01~ 2021, 02)


0003 자귀


늦은 산책길

월대천 물가

자귀나무 꽃

침실 조명등

자정이 붉다


조금 걸으니

어느 한 사람

길에서 잔다

식당 주차장

술에 취해서

드르렁 드렁

코 골며 잔다


어떻게 할까

깨울까 말까

신고를 할까

자귀꽃 피고

자귀 소리가

하늘 찍는다

밤을 찍는다


0004 오늘이 나의 마지막인 것처럼


나는 내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부터 나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내가 언제 죽게 되더라도 후회하지 않고 잘 떠나기 위하여,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삶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나는 언제나 정리가 서툴렀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정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틈틈이 정리를 하려고 한다. 앞으로 잘 가기 위해서는 정리를 잘해야만 한다. 영정 사진을 찍으면 오래 산다는 말이 있다. 영정 사진을 찍는 마음으로 나의 삶과 나의 꿈과 나의 글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인 것처럼, 오늘이 나의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야만 하겠다. 사람은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사느냐에 따라 다르다. 나는 이제 앞으로 아름다운 시인들과 함께 살기로 하였다. 앞으로 몇 명의 시인들과 함께 살게 될지 나는 아직은 모른다. 하늘만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먼저 의미 있는 시인들부터 만나기로 한다. 나는 우선 윤동주 시인과 함께 살면서 앞날을 모색하기로 한다. 얕게 많은 시인들을 만나는 것보다 나는 차라리 한 시인을 만나더라도 깊이 아주 깊이 만나보고 싶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비가 와도 내 몸의 어처구니가 벌떡 일어선다. 어처구니를 잡고 살살 나의 몸과 마음을 돌린다. 나의 몸과 마음이 서서히 뜨거워지고 있다. 나의 영혼까지 불꽃이 옮겨 붙을 것만 같다. 나는 오늘도 어처구니가 있고 비가 내려도 구름 뒤로 해가 떠오른다. 해에게도 어처구니가 있다. 해도 자신의 어처구니를 손으로 잡고 서서히 돌리기 시작한다. 어둠의 부스러기들이 빗물에 젖으며 서서히 갈리기 시작한다. 콩물처럼 맷돌에서 뚝뚝 떨어진다.



산동애가, 가사, 지화자, 1961년 (osulgil.com)

https://youtu.be/SfJSdH0rf8U?si=SSfdQtyet5nrCVRL

https://youtu.be/-3L5XtpwcOc?si=bAwsEKuqfx9a5eNS

https://blog.naver.com/koh34/223347869035


https://youtu.be/fx65ExrdcLc?si=rUMNgVTrzj_j8LVd

여순사건 70주기 "그 아픔과 선율" (여수mbc 창사 48주년 특집) 역사학자 주철희 박사 *노래 - 여수 블루스 / 여수야화 / 산동애가 / 부용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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