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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과 함께 62

―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by 강산 Mar 2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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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과 함께 62

―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어린시절 나는 고향을 떠나고 싶었다

가족들에게 나의 심장병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심청이처럼 나도 가족들을 구하고 싶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심판 선고가 늦어지면서

우리나라는 해방정국의 혼란으로 접어들고 있다

지주와 소작인들의 싸움이었던 소작쟁의는

자본가와 노동자들의 싸움으로 확대되었거나,

친일파, 친미파들과 자주민주 주체세력의 싸움이 되었다


우리 민족의 뿌리부터 다시 살펴보고 있는데

나를 낳아준 곡성이 곡성군사 다섯 권을 보내왔다

태백산맥의 고장, 벌교와도 그리 멀지 않은 곡성

벌교의 말과 곡성의 말이 그렇게 멀지 않아서 좋다


여수14연대 봉기군이 곡성까지는 접수하지 못했다 한다

지리산으로 입산한 빨치산들이 백아산, 백운산, 조계산

인근 산으로 옮겨 다니며 곡성을 지나갔다고 전한다

백운산 사령부 제7연대와 조계산 사령부 제8연대, 바로 그

토벌군들이 18명을 희생시켰고 100여 명이 희생되었단다


나는 새마을운동 세대이지만

현대사는 차차 살펴보기로 하고

우선은 곡성군의 지명들부터 깊이 생각한다


벌교는 뗏목다리 때문에 벌교가 되었다는데

곡성은 어떤 연유로 곡성이 되었을까


어린 시절 그토록 떠나고 싶었던 고향이

이제 늙으니 다시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 되었다

나도 심청이처럼 부활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곡성군(谷城郡)


전라남도의 동북부에 있는 군. 주곡 작물의 재배가 성하고, 특히 돌실낳이 삼베와 사과의 산지로 유명하다. 명승지로 압록 유원지, 관음사 따위가 있다. 군청 소재지는 곡성, 면적은 547.43㎢.


백제시대에는 욕내(欲乃) 혹은 욕천(浴川)군으로 불렸는데, 산맥과 하천의 흐름을 본떠 신라 경덕왕 때는 곡성(曲城)으로 부르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시골장을 떠돌아다니는 장사꾼들이 교통이 불편하여, 통행에 어려움을 느낀 나머지, 지나갈 때마다 통곡을 한다 하여 곡성(哭聲)이라 불렀고, 그 후 곡성(穀城)으로 변경되었다. 이후 국가에서, 지명만을 생각하고 조세를 부과한다는 주민여론에 따라 이를 개칭하여, 곡성(谷城)으로 불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원삼국시대에는 마한 구해국이 위치했고, 백제에 흡수된 이후에는 곡나(谷那) 또는 욕내군(欲乃郡)이 있었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 전국 지명을 한화하면서 곡성(谷城)으로 바꾸었다. 고려시대에 한자가 哭聲으로 바뀌었고, 뜻이 좋지 않아 穀城으로 변경되었으나 나라에서 곡식 곡(穀) 자를 보고 풍족한 동네로 착각해서 조세를 많이 부과한다고 하여 다시 谷城으로 변경되었다. 1914년에 창평군이 담양군에 병합될 때 1908년 창평군이 병합했던 옥과군 일원을 가져왔다. 또한 구례군에서 고달면을 편입하였다. 1979년 곡성면이 곡성읍으로 승격하였다.


*  곡성(谷城)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여러 가지 설이 있을 수 있겠으나,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냥 한자 그대로 골짜기가 깊고 높은 산의 고개가 많은 고을이라 생각하면 무난할 것 같다. 곡성군(谷城郡)은 노령산맥과 소백산맥의 정기를 받고 섬진강과 보성강의 젖줄을 근간으로 고대에서부터 뿌리내려 지금의 숲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산이 높으면 당연히 골짜기도 깊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긍께, 곡성(谷城)이란 이름은 철학적이고 삶의 지혜가 담겨있는 참 좋은 이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삼기면(三岐面)


삼기면(三岐面)은 대한민국 전라남도 곡성군의 한 이다. 삼기(三岐)라는 명칭은 곡성·담양·순천으로 통하는 세 갈래의 길이 있은 데 유래한다. 즉, 삼기면은 삼거리란 뜻이다. 교통 측면에서 보면 삼기 삼거리나 곡성 톨게이트 부근이 중심일 것이다. 또한 삼기면 전체의 면적을 생각하면 농소리 부근이 중심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삼기면의 중심은 면사무소가 있는 원등리를 중심으로만 생각했다. 또한 삼기면 사람들을 삼기초등학교 관내만을 한정해서 생각했던 것 같다. 그야말로 우물 안 개구리였다. 


삼기면의 마을 지명유래


         원등 1구

의동(義洞) 마을

원등리(院嶝里)는 조선시대 역원제(驛院制) 시행 당시 옛 관리들이 공무로 출장나갈 때 숙식을 해결하던 여관 즉 원(院)이 소재하던 곳이라 하여‘원(院)’자와 원(院)이 비등(飛嶝)이라 부르는 언덕배기에 자리잡고 있었다 하여 ‘언덕배기 등(嶝)’자를 취해 ‘원등리(院嶝里)’라 불렀다 전한다. 의동(義洞)은 유교 도덕의 기본이 되는 덕목으로 사람이 항상 행하여야 할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중 현 원등리 3구(院嶝里3區)가 먼저 첫 자인 인(仁)을 취해 인동(仁洞)으로 칭하였기 때문에 다음자인 의(義)자를 따서 의동(義洞)이라 명명하였다 전한다.


        원등2구        

내동(內洞)마을
내동(內洞)이라고 하는 마을은 마을이 커서 원등리(院嶝里)를 5개부락(의동, 내동, 인동, 학동, 덕동)으로 나누었을 때, 인동(仁洞)과 의동(義洞) 사이 안골에 있다고 하여 내동(內洞)이라고 명명(命名)하였다.


        원등3구        

인동(仁洞)마을
인동(仁洞)은 유교 도덕의 기본이 되는 덕목으로 사람이 항상 행하여야 할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중 첫 자인 인(仁)을 취해 인동(仁洞)으로 칭하였다. 마을 조성시에는 마을 가운데로 ‘연갈천’이 있었으나 현재는 우회하고 있다. 이 연갈천을 경계로 하여 옥과현(玉果縣)과 곡성현(谷城縣)으로 나뉘어졌다.


        원등4구        

학동(鶴洞)마을
마을 형성내력은 원등1리(院嶝1里)와 같다. 인동(仁洞), 의동(義洞), 내동(內洞) 마을이 차례로 형성된 후, 1800년경 밀양박씨(密陽朴氏) 박재록(朴載祿)이 수원백씨(水原白氏)와 결혼하여 처가 근처를 따라 입면 제월리(齊月里)에서 이곳으로 이주 정착하였다.


        원등5구        

어덕촌(於德村)마을
삼기(三岐)마을을 내려다보는 양지바른 곳에 위치하며 마을이 언덕에 자리잡고 있어 어덕촌(於德村)이라 하였다. 덕동(德洞)이라고도 부르며, 80여년전에는 목양리(牧羊里)와 합해 100호(戶)가 넘었으나 자리가 비좁고 위치가 좋지 않아 차츰 줄어들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같은 원등리(院嶝里)이나 조선시대에는 곡성현(谷城縣)에 속하였다.


        월경1구        

월경(月境)마을
본 마을은 ‘곡성현(谷城縣)과 옥과현(玉果縣)의 경계(境界)에 위치하였다’하여 ‘월경리(越境里)’라 칭하였다. 그러나 조선조 중엽(朝鮮朝中葉) 마을 유림(儒林)들이 ‘월(越)’자 보다는 ‘월(月)’자가 더 운치가 있다 하여 ‘월경리(月境里)’로 개칭한 것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지금도 겸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월경2구        

행정(杏亭)마을
성덕처녀(聖德處女, 심청전의 유래)가 벌교에서 관음상(觀音像)을 모시고 오산(梧山) 관음사(觀音寺)로 가던 도중 쉬는 곳마다 정자(亭子) 이름를 붙여오다 이곳에서 별세(別世)를 했는데, 이분이 생전에 차일봉(遮日峯)을 넘어 암자에서 마을을 내려다 보니 살구꽃이 만발한 마을이 대촌(大村)을 이루고 있어 ‘살구 행(杏)’자를 따서 ‘행정(杏亭)’이라 불렀다 전해온다.


        괴소1구        

연봉(蓮峯)마을
마을 앞의 산세(山勢)가 풍수지리적으로 연화도수(蓮花到水) 형국(形局)이다 하여 ‘연봉(蓮峯)’이라 불러 왔다. 그후 연봉마을 좌측 지역으로 수원백씨(水原白氏) 백병선(白柄善)이 원등리에서 이주해 와 정착하며 새로운 연봉마을이란 뜻으로 ‘신연(新蓮)’이라 이름지어 불러 두 마을 이름을 혼용해 사용했으나 지금은 ‘연봉(蓮峯)’으로 통합해 부르고 있다.


        괴소2구        

괴소(槐所)마을
본 마을은 최악산(또는 초악산) 기슭에 자리잡고 대명산(大明山)을 바라보며 경사진 양지 바른곳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는 마을 형국이 고양이형이라 하여 괴소(猫所)라 불렀으나 1830년경이 마을출신 한학자인 학산 강진영(鶴山姜震永) 선생이 ‘고양이 묘(猫)’자를 ‘느티나무 괴(槐)’자로 한자음만 바꾸어 ‘괴소(槐所)’라 칭하여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현재는 원래의 괴소마을과 거리상 300m쯤 위 아래쪽으로 떨어져 나뉘어져 있는 금정마을과 통합되어 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국도(國道) 27호선에 접해 있는 금정(金亭)마을은 당초 황새골에서 1978년 취락구조개선(聚落構造改善)으로 현재의 마을터로 옮겨졌는데 ‘쇠쟁이’를 한자화 해 ‘금정(金亭)’이라 명명(命名)하여 부르고 있다.


        의암1구        

서봉(棲鳳)마을
마을앞 밭 가운데 소나무가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봉황(鳳凰)이 서식(棲息)한 곳이라 하여 ‘서봉(棲鳳)들’이라 부른다. 이 들 이름을 따서 ‘서봉(棲鳳)마을’이라 했다. 마을위에 저수지가 있는데 ‘우음저수지(牛飮堤)’라 부른다. 그 주변의 산이 ‘소가 누워 있는 형국’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그 형상(形象)은 ‘구시 옆에 소가 누워 여물을 먹고 있는 상(象)’이라는 설(說)에 의해 과거 자리잡고 있었던 마을을 ‘우음(牛飮)마을’이라 불렀으며, 일명 ‘쇠미’라고도 부른다.


        의암2구        

의암(儀岩)마을
마을 뒷산인 차일봉에서 뻗어내린 산자락을 중심으로 좌우 양쪽으로 마을이 나뉘어 있다. 즉, 반석(磻石)과 의암(儀岩) 두 마을이 있는데 지표에 암반이 많이 깔려 있어 돌위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반석(磻石)이라 부르고, 바위와 폭포가 비슷하게 생겼다 하여 의암(儀岩)이라 명명(命名)하였다.


      금반1구      

금반(金盤)마을
마을 지형이 소반형태를 이루고 있어 ‘금반(金盤)’이라 하였다. ‘동성(東星)마을’은 동악산 형제봉(兄弟峰)으로 부터 굽이쳐 흘러 내려온 산맥이 우뚝솟아 태봉(台峰)을 이룬 안산(安山)을 등지고 동으로 통명산(通明山), 남으로 차일봉(遮日峰)을 바라보는 고지대에 위치해 항상 구름이 감싸고 있다하여 ‘운곡(雲谷)’이라 이름하였으나 지금은 마을이 없어지고 ‘동막골’과 ‘장성백이’사이로 옮기어져 ‘동성(東星)’이라 부르고 있다.


      금반2구      

율곡(栗谷)마을
마을 뒤로는 통명산맥(通明山脈)이 뻗어내려 있고 지형이 곧을 정(貞)자형으로 삼한시대(三韓時代)에는 석정(石井)이라고 불리우는 고을 군(郡)의 소재지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마을 주위에는 밤나무가 무성하여 밤(栗)자와 곡(谷)자를 붙여 ‘율곡(栗谷)’ 또는 ‘밤실’이라 부르고 있다. 1950년대까지 웃밤실(금반2리), 아래밤실(금반3리)로 나뉘어 있었으나 현재는 2리, 3리를 통합하여 금반2리가 되었다.


      청계1구      

청계(淸溪)마을
마을 앞쪽에 ‘금거북이가 사는 맑은 시내물이 흐르고 있다’하여 청계(淸溪)라 명명(命名)하였다. 마을앞에 있는 들이름은 ‘몰이등’인데, ‘몰이’는 이 지역의 풍수지리적 형국이 ‘황금거북이가 진흙속에 묻혀있다’는 ‘금구몰이(金龜沒泥)’혈(穴)이라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마을 앞쪽 삼기천 상류를 청계천(淸溪川)이라 부르는 것은 ‘이 금거북이가 기어나와 맑은 물이 흐르는 시냇가의 모래속으로 파고 들어간다’하여 붙여진 명칭이라고 전해온다.


      청계2구      

봉현(鳳峴)마을
통명산(通明山)과 대명산(大明山) 사이에 위치한 마을이다. 마을의 지세가 ‘가활만인지지(可活萬人之地)’로 ‘후세에 자손이 번창하고 영화를 누린다’는 풍수설에 의해 자리 잡은 마을이라 전해온다. 마을 좌측에 ‘새지등’과 ‘선우고개’등의 고개가 있어 마을명을 ‘봉황새가 깃든 고개마루’라는 뜻의 ‘봉현(鳳峴)’이라 칭하였다. 봉현마을은 별칭으로‘을자등’, ‘을자동’ 또는 ‘새지등’이라고 부른다. 이는 마을이 한자로 ‘새 을(乙)’이란 글자(字)를 닮은 산등성이 아래에 자리잡은 마을(洞)이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농소1구      

주산(舟山)마을
마을뒤에 ‘배고개’가 있고 마을 앞 최악산(또는 초악산)에‘배를 매는 고리’가 있다는 지명과 전설, 그리고 불로치(不老峙)에서 흐르는 물과 금반(金盤)에서 흐르는 물이 합류되는 삼각지점이 Y자 형태로 ‘배의 형국’이 틀림없다 하여 ‘배 주(舟)’자와 마을주변 들 이름이 ‘중뫼’이기에 ‘곡식이 산더미 같이 쌓인다’는 뜻에서 ‘뫼 산(山)’자를 택해 ‘주산리(舟山里)’라 명명(命名)했다. 일명 들 이름을 따 ‘중뫼’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농소2구      

오리동(梧里洞)마을
앞산이 ‘와우혈(臥牛穴)’이고, 옆산에 ‘쉬빗장’들이 있으며, 뒷산은 ‘질매재’가 있어 ‘소가 농사와 더불어 일한다’는 뜻으로 ‘농(農)소’라 불러온 것을 ‘농소(農所)’라 표기했다. 농소는 자연부락명으로 선비들이 선호하는 오동나무가 많이 서식하는 마을이라 하여 ‘오리동(梧里洞)’이라 불렀으며, 오동나무와 더불어 마을에 ‘사슴이 목욕하고 물을 마신다’는 탕록음수(湯鹿飮水)의 사슴혈(穴)이 존재한다 하여 ‘오록(梧鹿)골’이라 불렀다 전한다.


      농소3구      

대명(大明)마을
대명산(大明山)을 뒤에 두고 통명산(通明山)을 바라보는 산기슭 마을로 수원(水源)이 좋고 농토가 비옥하여 산지이용이 좋아 새로 터를 잡았다 하여 ‘새터(新基)’라 하였으나, 대명산(大明山) 밑에 위치한다 하여 ‘대명(大明)마을’이라 불리우고 있다.


      노동1구      

노동(蘆洞)마을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마을이 기러기가 갈대를 입에 물고 날아가는 형국인 ‘비안함노(飛雁含蘆)’의 혈처라는 것으로 이런 의미에서 ‘갈대 노(蘆)’자를 취해 ‘노동(蘆洞)’이라 명명하였다고 전해온다. 한편, 자연부락명으로 ‘갈골’이라 불러오고 있는데, 갈대가 많은 골짜기란 뜻에서 ‘갈골’이라 불러오고 있다는 설과 마을이 산이 갈라지는 골짜기에 위치했기 때문에 ‘갈골’이라 불러오고 있다는 설이 전해온다.


      노동2구      

남계(南溪)마을
지리적으로 보아 통명산(通明山)을 등지고 삼기면(三岐面)의 남쪽 계곡에 위치하였다 하여 남계(南溪)라 부르게 되었다.


      수산1구      

동편(東便)마을
남쪽으로 국사봉(國師峯)을 바라보며 서쪽에 차일봉(遮日峯), 북으로 대명산(大明山) 등 명산에 둘러쌓여 산의 경치가 아름답고 맑은 물이 흘러 산자수명(山紫水明)하다 하여 ‘수산(水山)마을’이라 부르고 있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하천을 중심으로 동편(東便)마을, 서편(西便)마을로 나뉘어 부른다.


      수산2구      

수산동(水山洞)마을
남쪽으로 국사봉(國師峯)을 바라보며 서북쪽에 차일봉(遮日峯), 동으로 대명산(大明山) 등 명산에 둘러쌓여 산의 경치가 아름답고 맑은 물이 흘러 산자수명(山紫水明)하다 하여 ‘수산(水山)마을’이라 부르고 있다.


      근촌1구      

근촌(根村)마을
곡성의 명산인 통명산(通明山)이 마을위의 대명산맥(大明山脈)에서 흘러내려 갔다는데 근거하여 ‘뿌리 근(根)’자를 택해 ‘근촌(根村)’이라 명명(命名)하였다. 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河川)과 ‘평전들’을 중심으로 대명산(大明山)하단 양지쪽에 위치한 마을을 양지촌(陽地村), 국사봉(國師峰) 하단 음지쪽에 자리잡은 마을을 음지촌(陰地村)이라 부른다.


      근촌2구      

수금(繡錦)마을
마을을 두개의 마을로 구분해 부른다. 즉, 마을 양편에 흐르는 물을 성(城)이라 하여 ‘수성(水城)’으로 부르던 마을 명칭을 ‘수석(水石)마을’로 부르고 있으며, 윗마을은 국사봉(國師峰) 기슭에 위치한 골짜기와 숲으로 둘러 쌓여 있으며 ‘단풍이 비단처럼 물들어 수를 놓은 한폭의 그림 처럼 아름답다’하여 ‘비단 수(繡)’자에 ‘비단 금(錦)’자를 명명(命名) ‘수금(繡錦)마을’이라 불렀다. 1930년 행정구개편(行政區改編)에 의해 근촌2구(根村2區)로 구분되었다.


      경악리      

복룡(伏龍)마을
용(龍)이 엎드려 있는 형국이라 하여 ‘복룡(伏龍)’과 ‘경악동(敬岳洞)’그리고 길 옆에는 큰 돌이 있었는데, 길이 비좁아 왕래할 때 그 바위를 붙잡고 코를 바위에 얹고 건넜다 하여 ‘코심바위’라는 세 마을이 있었다. 일제시대 때 마을의 구장(區長)이 경악동(敬岳洞)에서 살고 있어서 1914년 행정구역개편시 3개 마을을 합쳐 경악리(敬岳里)라 하였다. 1970년 호남고속도로 개설로 경악동은 없어지고, 1987년 취락지 개선사업으로 복룡마을과 코심바위마을만 남게 되었다.


      금계리      

통명(通明)마을
전하는 바에 따르면, 남동쪽에 불경학자(佛經學者)인 용인대사(龍仁大師)가 태어났다 해서 ‘용계(龍溪)’라는 마을과 북서쪽 통명산(通明山) 자락에 금계리(金鷄里)가 있다. 두 마을 주변에 금계포란(金鷄包卵) 형국이 자리잡고 있다 하여, 용계리와 통명리(通明里)를 통틀어 ‘금계리(金鷄里)’라 명명하였다. 금계리(金鷄里)계곡엔 ‘용계리(龍溪里)’, ‘통명리(通明里)’, ‘명동’, ‘아랫몰’등 4개 마을이 흩어져 있었지만 현재는 통명리(通明里), 용계리(龍溪里) 2개 마을만 남아있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태백산맥 1-1. 일출 없는 새벽

    

  4

  그래도 봄이 오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밤마다 온갖 귀신들이 나온다는 흉흉한 소문 같은 것은 아랑곳없이 두 여자가 거기서 줄곧 살고 있었다. 무당 모녀였다. 현부자가 제각과 별장을 신축하면서 그들이 거처할 조그만 집을 바깥 터에다 마련해준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현부자네 전속 무당인 셈이었고, 무당 월녀의 굿은 신통력이 높기로 근동에 소문이 짜했다. 그녀는 일찍부터 보성·고흥 일대를 발판으로 삼고 있는, 가락 좋고 춤사위 좋기로 그 이름을 떨친 당골네였다. 그녀의 굿판도 굿판이지만 그 미모가 빼어났다. 고운 얼굴뿐이 아니라 정갈한 춤으로 단련된 그녀의 몸매는 가냘픈 듯하면서도 탄력이 넘쳤다. 마흔이 넘기 전까지만 해도 수많은 남자들의 비릿한 눈길이 그녀의 몸을 더듬어내리고는 했지만 그래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무당이었던 까닭이다. 무당을 탐하거나 잠자리를 잘못 했다가는 귀신붙어 급살을 맞거나 병신을 면치 못한다는 속설 때문에 남자들은 함부로 범접하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녀가 딸 소화에게 대물림굿을 장만한 것은 해방되기 이 년 전이었다. 그 굿판은 근동 사람들의 더없이 좋은 구경거리가 되었다. 현부자가 굿판을 푸지게 차려주기도 해서였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열일곱 살 난 소화가 대물림을 받아 무당이 되는 데 있었다. 그 굿을 구경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구한 운명의 아픔과 그 비애의 멍울을 가슴에 담아야 했다. 어미의 미모를 타고난 소화는 그대로 한떨기 꽃이었고, 어미의 눈웃음과 수다스러움이 자칫 천박으로 빠지기 쉬운 데 비해 소화는 웃음이 없고 말수가 적은 품이 어떤 기품까지를 느끼게 했다. 그런 처녀가 무당이 될 대물림굿을 받는 것이고 마흔아홉 살의 늙은 어미무당은 울며울며 굿춤을 추었는데 그건 춤이 아니라 차라리 몸부림이었다. 대물림을 받은 열일곱 살 소화가 춤을 추기 시작했을 때 겹겹으로 둘러선 여인네들은 하나같이 콧등 매운 눈물을 찍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정하섭은 중학생의 몸으로 차마 가까이 가지 못한 채 먼발치에서 그녀의 춤추는 몸짓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릿거리기만 하는 그녀의 몸짓은 그의 마음을 더 안타깝게 만들었고, 주술성이 강한 풍악소리들은 그녀에게 걸쳐진 그의 마음을 매몰차게 끊어내는 것만 같았다.

  정하섭은 나무 그림자가 드리운 어둠에 몸을 숨긴 채 월녀네집 동정을 살폈다. 산의 침묵과 밤의 정적에 묻힌 조그만 기와집은 사람의 거처 같지가 않았다. 그는 민첩한 동작으로 어둠을 벗어나 월녀네집 처마 밑으로 파고들었다. 방 셋에 부엌 하나인 집 구조는 오래도록 눈에 익은 것이었다. 부엌과 붙은 방이 그녀들의 안방이었고, 그 옆방은 신을 모신 신당이었다. 부엌에서 꺾여 붙은 것은 헛간방이엇다. 정하섭은 안방 쪽으로 바르게 몸을 움직여 문에 귀를 기울였다. 전혀 인기척을 느낄 수가 없었다. 혹시 어디로 굿 떠난 것은 아닐까. 정하섭은 일순 낭패감에 빠졌다. 굿이 성할 계절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손가락에 침을 묻혔다. 그리고 격자문의 창호지에 구멍을 냈다. 구멍을 통해서 들여다보는 방안은 바깥보다 한결 어두웠다. 그러나 두 사람이 잠들어있는 어렴풋한 윤곽은 이내 파악할 수 있었다. 정하섭은 안도하며 문고리에 손을 뻗치다가 멈칫했다. 부엌과 신당으로 빠른 눈길을 보냈다. 그는 기민한 동작으로 부엌 안을 확인했고, 신당의 문에  구멍을 뚫어 샅샅이 살폈다.

  "여보시오, 여보시오......"

  문고리를 흔드는 정하섭의 손이 떨렸고, 낮은 목소리는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방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여보시오, 여보시오."

  "누, 누구요!"

  잠기운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겁질린 목소리가 짧은 절규처럼 다급했다.

  "어서 문 좀 여시오. 급한 일이요."

  "누군디요, 누구......"

  젊은 여자의 허둥대는 목소리는 이쪽의 신원을 알고자 하고 있었다. 외딴 곳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뒤숭숭한 시국이기도 했다.

  "보면 알 만한 사람이요. 어서 문부터 열어요."

  정하섭은 간략하게 자신이 누구인가를 밝혀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을 대자니 상대방이 알 것 같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버지의 직업을 빌려 '술도가집 아들'이라고 하기는 싫었다.

  "금메, 이 밤중에 누구신지 알아야제라. 존 일 헌다고 누군지부텀 말씀허시씨요."

  방안의 목소리는 애원을 하고 있었다.

  "얼굴을 보면 안다니까. 헤치지 않을 것이니 문부터 열어. 밖에 이러고 있을 수가 없는 사람야."

  정하섭은 방문을 부술 듯한  기세로 거칠게 흔들었다.

  "쪼끔 있으씨요, 열것구만이라, 열어요."

  문고리가 벗겨지는 것을 기다려 정하섭은 서두르는 기색 없이 방문을 잡아당겼다. 여자를 더 이상 공포스럽게 만들어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안심하시오, 헤치지 않을 테니까. 마음 가라앉히고내 얼굴부터 봐요. 누군지 알아보겠는지."

  정하섭은 방으로 들어서지 않고 자신의 얼굴을 흐린 달빛 쪽으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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