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한 대 ㅡ
내 방에 풍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光明)의 제단(祭壇)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祭物)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리고도 그의 생명(生命)인 심지(心志)까지
백옥(白玉)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 버린다.
그리고도 책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가듯이
암흑(暗黑)이 창구멍으로 도망간
나의 방에 풍긴
제물(祭物)의 위대(偉大)한 향(香)내를 맛보노라.
_ (1934.12.24. 윤동주 17세, 최초의 작품)
1. 초 한 대 (시), 1집(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
정음사 중판 1955, 삼판 1976
_ (1934.12.24. 윤동주 17세, 최초의 작품)
1. 초 한 대 (시) _ 1집, 중판, 삼판
* 육필 시고에는 ‘초한대’로 되어 있음
윤동주 시인은 1934년 12월 24일 <초 한 대>,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 등 3편의 시를 썼다. 어쩌면 그전에 쓴 시 중에서 자신의 마음에 드는 시 3편을 옮겨 적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나의 경험으로 보아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마음으로 시인이 되어야겠다고 결심을 했기 때문에 그전에 썼던 많은 작품 중에서 자신의 마음에 드는 시를 옮겨 적고, 그날부터 날짜를 기록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송몽규의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술가락>이 1935년 1월 1일 자 신문에 실렸으니 당선 통보는 그전에 이미 전달되었을 것이다.
이 세 편의 작품 수준이 상당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습작은 이미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지금까지 윤동주 시인의 시 이야기를 할 때, 이 세 작품을 윤동주 시인의 처녀작으로 인정하고 있다. 앞으로 또 다른 작품이 발굴될 수도 있으나 우선은 이 작품들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그중에서 <초 한 대>가 가장 앞부분에 실려있으므로 <초 한 대>부터 살펴본다.
이 시는 우선 제목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제목을 <초 한 대>로 해야 할지 <초한대>로 해야 할지 먼저 결정할 필요가 있다. <초 한 대>로 했을 때는 '초 한 자루'로 해석하면 되지만 <초한대>로 했을 때는 '초하다'라는 의미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윤동주 시인이 <초한대>라고 썼다는 점에 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초하다'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초하다 1抄하다 (초한대) 동사, 필요한 부분만을 뽑아서 적다.
초하다 2炒하다 (초한대) 동사, 노릇노릇하게 되도록 불에 약간 볶다. 주로 한의학에서 약재를 볶는 일이다.
초하다 3草하다 (초한대) 동사, 글의 초안을 잡다.
초하다 4憔하다 (초한대) 형용사, 몸이 마르고 낯빛이나 살색이 핏기가 전혀 없다.
나는 자의적으로 초 하나 혹은 초 한 자루 혹은 초 한 개 혹은 초 한 대로 이해하고 이 시를 읽는다. 이 시는 간단하게 생각하면 간단한 시일수도 있으나 깊이 생각하면 한없이 깊어지는 시가 될 수도 있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단어들이 있다. 광명, 제단, 제물, 염소의 갈비뼈, 심지, 피, 선녀, 매를 본 꿩, 암흑의 창구멍, 제물의 위대한 향내..., 이런 시어들을 보면 우리는 먼저 예수와 기독교와 십자가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윤동주 시의 출발은 십자가의 씨앗으로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초 하나가 있다. 백의민족처럼 흰옷을 입은 초 하나가 있다. 몸도 마음도 온통 하얀 초 하나가 있다. 영혼까지 하얀 초 하나가 있다. 초 하나 때문에 내 방 안은 향기로 가득하다. 방안의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여야만 한다. 자신의 몸을 소신공양으로 바쳐야만 어둠을 몰아낼 수 있다. 초의 심지에 불을 붙인다. 초의 심지에 불을 붙이기 위해서는 먼저 결심이 필요하다. 심지(心志), 마음에 품은 의지가 필요하다. 세상을 밝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희생이 필요하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하여 세상을 구하겠다는 결심이 필요하다. 자신이 스스로 무너져 내려야만 세상을 구할 수 있다. 스스로 무너짐으로써 무너지는 세상을 바로 세울 수 있다. 스스로 광명의 제단을 쌓고 깨끗한 제물이 되어야만 한다. 먼저 심지가 타올라야만 한다. 먼저 마음이 타올라야만 한다. 먼저 의지가 타올라야만 한다. 심지에 불이 붙으면 몸이 서서히 녹아내리면서 세상을 밝힌다. 어둠은 서서히 물러나고 암흑까지 녹아내린다. 환영처럼 그의 몸이 보인다. 환상처럼 염소의 갈비뼈 같은 예수의 몸이 보인다. 서서히 녹아내리는 자신의 몸과 서서히 물러나는 어둠이 보인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도 보인다. 그림자들이 너울거린다. 백옥 같은 눈물도 보이고 붉은 피도 보인다. 어둠과 함께 집착과 욕망과 거짓과 시기심까지 모두 불태워버린다. 나는 그렇게 초 한 자루가 되어 스스로 소신공양을 한다. 위대한 헌신과 지극한 미덕은 그렇게 초 한 자루가 되겠다는 심지(心志)에서 출발한다. 아낌없는 열정으로 자신을 불태울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숯덩이 하나 남기지 않고 완전히 연소할 수 있는 영혼은 아름답다. 재가 없는 사람은 맑고 투명하다. 죄가 없는 영혼은 가볍다. 그렇게 스스로의 생명을 불사르는 촛불이 있다. 나와 촛불이 하나가 되어 춤을 춘다. 선녀처럼 춤을 춘다. 아니, 도깨비처럼 춤을 춘다. 나와 촛불은 한 몸이 되어 도깨비처럼 함께 춤을 춘다. 물아일체가 된다. 한 몸이 되어 춤을 추며 날아오른다. 나는 촛불이 되고 촛불은 내가 되어 불꽃으로 타올라 춤추는 하늘이 된다. 우리들은 그렇게 완전연소를 꿈꾸며, 춤을 추며 불타오른다. 그렇게 한 생을 살다 보면 어둠은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암흑은 창구멍으로 도망갈 것이다. 나의 방과 나의 세상은 드디어 환해질 것이고 우리들의 세상은 그런 제물들의 희생으로 더욱 향기로워질 것이다. 그런 위대한 제물이 되어 아름답게 사라지는 나는 행복할 것이다. 작은 초 한 자루는 우리들을 이렇게 아름다운 환상 속으로 여행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윤동주 시인은 아마도 자신의 젊음을 위해서, 사랑과 조국을 위해서 , 환하게 불타오르는 한 자루의 초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세상을 환하게 밝혀주는 촛불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스스로를 불태우고 싶은 열정과 기도가 있었을 것이다. 이 한 편의 시만 읽어도 윤동주 시인의 마음이 보인다. 윤동주 시인의 기도가 보인다. 윤동주 시인의 심지(心志)가 보인다. 윤동주 시인의 윤동주가 보인다. 윤동주 시인은 횃불을 노래하지 않고 촛불을 노래하고 있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송몽규의 삶이 횃불이었다면 윤동주의 삶은 촛불이었을 것이다. 세상을 향해 부르짖는 횃불이기보다는 자신의 내면과 자신의 방을 밝히는 촛불이 되고자 했을 것이다.
이 시와 관계없이 나는 초에 대하여 깊이 생각한다. 초는 보통 희생정신이나 자기희생을 상징한다. 자신의 몸을 불태워 세상을 밝히는 등신불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예수님이다. 그리고 그 정신은 십자가와 통한다. 또한 우리의 일상과 우리나라의 촛불집회를 연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앞서 나의 가난이 먼저 떠오른다. 우리 집에서는 돈이 없어서 촛불도 마음 놓고 켜지 못했다. 촛불보다 훨씬 어두운 작은 등잔불을 켜고 겨우 저녁밥을 먹었다. 그 등잔불에 들어가는 석유도 아깝다며 빨리 불 끄고 자라는 말을 귀에 말뚝이 박히도록 듣고 살았다. 또한 초를 생각하면 학교 교실과 복도의 나무 바닥이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초를 칠하고 걸레질을 하던 생각이 자주 난다.
그리고 나는 요즘 산방굴사에 자주 올라간다. 산방굴사에는 언제나 많은 촛불이 켜져 있다. 기도발이 좋다는 소문이 퍼져서 자정 무렵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촛불을 켜고 기도를 한다. 하얀 초의 몸통에 검은 소원과 이름과 날짜까지 적어놓고 손을 싹싹 비비며 기도를 한다. 나는 예수님과 부처님을 공평하게 함께 존경한다. 하지만 예수님만 믿는 사람들은 양초를 예수님 몸으로 생각할 것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양초를 또 다른 무엇으로 생각할 것이다.
윤동주 시인은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기독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다. 특히 그는 예수님의 삶에 깊이 젖어있었던 시인이었다. 기독교의 무조건적인 믿음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의 생애와 예수님의 삶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자기 자신도 예수님처럼 살려고 노력한 사람이었다.
예수님의 몸이신 양초, 소의 갈비뼈도 아닌 염소의 갈비뼈 같은 연약한 인간으로 오셨던 사람, 초의 생명의 심지처럼 아낌없이 먼저 타올랐던 사람, 자신의 맑은 피와 따뜻한 눈물로 온몸을 불살라 환하게 타올랐던 사람, 자신의 생명까지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주신 위대한 사랑 예수님, 고통의 끝을 보면서도, 선녀처럼 촛불은 천상의 춤을 춘다. 이를 본 꿩이 매를 본 듯, 매의 눈빛을 본 듯 도망하고, 암흑 같은 어둠이 창구멍으로 도망한다. 제물의 위대한 향내..., 멋지고 위대하게 예수님의 희생제물을 촛불로 비유하고 있는...., 마지막의 "맛보노라"만 없으면 더욱 좋았을 것 같은....,
이 시를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윤동주 시인의 소년 시절을 좀 알면 좋을 것이다. 윤동주 시인은 1925년 명동소학교(明東小學校)에 입학하여 재학 시절 고종사촌인 송몽규 등과 함께 문예지《새 명동》을 발간하였다. 6년 뒤인 1931년, 14세에 명동소학교(明東小學校)를 졸업하고, 화룡현립 제일소학교에 편입하여 1년간 수학하였다.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여,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 입학했다. 그리하여 윤동주 시인은 은진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이 시 <초 한 대>를 썼을 것이다.
그 후 윤동주 시인은 1935년에 소학교 동창인 문익환이 다니고 있는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전학하였다. 그해 10월, 숭실중학교 학생회가 간행한 학우지 숭실활천( 崇實活泉 ) 제15호에 시 공상(空想)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1935년 12월, 숭실학교 학생들이 '등불참배'를 거부한 사건이 발생했고 이듬해 1936년 1월 18일 학교장 '조지 S. 맥퀸'( 한국명 윤산온 )이 신사참배를 최종적으로 거부함으로써 1월 20일 교장직에서 파면된 후 미국으로 추방될 뻔했다. 이후 숭실중학교가 무기휴교로 폐교되어, 문익환과 함께 용정에 있는 광명중학교로 편입하였다.
나는 오늘 밤에 또다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촛불을 켠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을 위하여 기도를 한다. 지금 이렇게 인연이 닿아 서로의 호흡을 주고받을 수 있는, 세상의 단 한 사람, 당신을 위하여 나의 숨결과 나의 기와 나의 불꽃같은 마음을 보낸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단어들이 지나간다. 초 하나, 가치 전도, 돈의 위력, 사고의 유연성, 지혜의 활용성, 언어의 사고력, 사고의 언어력, 어둠도 필요한데 밝음을 더욱 좋아하는 사람들, 추위도 필요한데 따뜻함을 더욱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
수선화, 동백, 복수초, 매화, 무꽃, 배추꽃, 광대나물꽃...., 저마다의 가슴에 촛불을 켜고, 어둠을 불사르고 추위를 데워서, 따뜻한 봄을 부르는 2월, 더 많은 꽃들이 횃불 같은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아가서, 다시 함께 모여서 촛불을 들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묻는, 설날을 앞둔 오늘 밤에도 나는 윤동주 시인을 만나서 따뜻하고 환하게 촛불 하나 켠다.
대한민국 정부는 규암 김약연에게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했다. 그의 어록비가 천안 독립기념관에 세워졌다. 명동학교에서 김약연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김약연에게 배운 소년들은 그 시간들을 의미 있게 살리고 자신을 갈고닦아 명동학교 응원가에 쓰여 있듯 "후일 전공"을 세운다. 윤동주 시인과 명동학교에서 육 년을 함께 공부한 문익환(1918~1994) 목사는 <태초와 종말의 만남>에서 명동마을과 김약연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북간도에서 동만의 대통령이라고 불린 김약연 목사님이 자리 잡고 계시던 명동이 바로 윤동주와 내가 자란 고향이다. 나는 그 명동소학교에서 동주와 육 년을 한 반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명동에서 삼십 리 떨어진 곳 용정에 있는 은진중학교에서 삼 년을 같이 공부했다. 우리는 교실과 강당과 운동장에서 태극기를 펄럭이며 '동해 물과 백두산이...., '를 소리 높여 불렀다. 일본 사람들에게 돈을 안 준다고 동경 유학 시절에 전차를 타지 않고 꼭 걸어 다녔고, 기차를 안 탄다고 용정에서 평양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다 온 백발이 성성한 명희조 선생에게서 국사 강의를 들으며 우리는 민족애를 불태웠던 것이다. 하지만 동주의 민족애가 움튼 곳은 명동이었다. 국경일, 국치일마다 태극기를 걸어놓고 고요히 민족애를 설파하시던 김약연 교장의 넋이 어떻게 동주의 시에 살아나지 않았겠는가! 어떤 작품이던 조선 독립이라는 말로 결론을 내지 않으면 점수를 안 주던 이기창 선생의 얽은 모습이 어찌 잊히랴!
그런데, 아, 조선 독립이란 말로 결론을 내지 않으면 점수를 주지 않았다는 이기창 선생의 얼굴이 제주 4.3을 이끌었던 유격대 제2대 사령관 이덕구와 겹쳐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 소화(昭和) 9년 12월 24일
윤동주 시인은 <초 한 대>,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 3편의 시 말미에 소화(昭和) 9년 12월 24일이라는, 일본 천황의 연호로 날짜를 썼다. 소화(昭和)는 일본 124대 천황의 연호이다. 우리들이 흔히 알고 있는 히로히토(裕仁) 천황의 연호가 바로 소화(昭和)이다. 소화(昭和) 9년 12월 24일을 서기로 바꾸면 1934년 12월 24일이 된다. 윤동주 시인도 처음에는 무의식적으로 일본 청황의 연호를 썼다. 하지만 이후에는 예수님이 오셨다는 서기로 쓰기 시작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맹신·불신의 시대? 더 엄혹했을 때도 포용을 노래했다
[윤동주 80주기 / 어둠 넘어 별을 노래하다] [1] 별
이숭원 서울여대 명예교수
입력 2025.03.26. 00:02업데이트 2025.03.26. 18:32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1941. 11. 20.
윤동주 80주기를 맞아 그의 시를 새롭게 읽는 자리를 마련했다. 윤동주는 어둠의 시대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올바른 길을 찾으려 했다. 혼란스러운 대한민국. 그의 시에 담긴 진실의 힘이 새로운 길을 열어주기를 희망한다. /편집자
일러스트=이철원
지금 우리는 혐오와 분쟁의 시대를 살고 있다. 두 패로 나뉘어 맞서는 형세는 너무도 살벌하고 전투적이어서 내전을 연상케 한다. 이쪽에 대해서는 무조건적 맹신을, 저쪽에 대해서는 철저한 불신을 일관되게 토로한다. 서로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거친 언어로 상대를 적대시하며, 남의 약점을 찾아내기 위해 매섭고 사나운 눈길을 보낸다. 이런 상황이니, 사랑과 용서, 화해와 포용 같은 말은 사전에만 남은 죽은 단어가 된 것 같다.
이 황잡한 시대에 윤동주의 시를 다시 읽는다. 지금보다 가혹한 시대를 산 윤동주는 그 암울한 상황에서도 사랑과 포용과 희망을 노래했다. 바로 이 점이 윤동주의 고결한 특성이다. 윤동주는 다른 어느 시인보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였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남긴 시는 오늘날 우리에게 위안이 되고 힘이 되고 등불이 된다. 그의 시에는 어둠을 밝히는 진실의 빛이 있고, 고통을 달래는 위안의 손길이 있으며, 만물을 포용하는 사랑의 온기가 있다. 그의 순정한 시에 담긴 정결한 기운을 되살려 지금 우리 마음에 녹여 넣고 싶다.
1941년 11월 연희전문학교 졸업을 앞둔 윤동주는 시집을 내려고 시 19편을 묶었다. 원고 표지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을 적고 그다음 장에 위의 시를 적었다. 스물네 살 젊은이가 시집 머리에 앉힐 짧은 시의 첫 행에 “죽는 날까지”라는 극단적인 말을 썼다. 그의 생애를 아는 우리는 이 구절에서 가슴이 철렁한다. 윤동주는 결의를 강조하기 위해 이 말을 썼을 것이다.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기도하며 살겠다고 했다. 우리는 수없이 잘못을 저지르고 부끄러운 일을 많이 하는데, 윤동주는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기를 소망했다. 이것은 매우 가혹하고 엄격한 결단이다.
단 한 점도 부끄러움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인한 결의를 내세운 후, 윤동주는 조금 뒤로 물러서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고 썼다. 잎새에 바람이 이는데 왜 괴로워한단 말인가? 그렇게 작은 변화가 일어나도 그것이 자신의 어긋남과 관련이 없는지 돌이켜보았다는 뜻이다. 세계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그것과 관련지어 자신을 되돌아보는 예민한 자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태도를 지니고 살면 시련과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는 “나한테 주어진 길”을 가겠다고 말했다.
‘나에게 주어진 길’이라는 말에는 기독교적 소명 의식이 담겨 있다. 소명의 길을 걸으면서 그가 소임으로 내세운 것이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일이다. 윤동주 시 여러 편에 별 이미지가 나타나는데, 대부분 순수성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이 시에서 별은 어둠 속에서 빛을 내고 갈 길을 이끌어주며 생명의 사랑을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 윤동주는 바로 그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살면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겠다고 다짐했다.
‘모든 죽어가는 것(the mortal creature)’은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뜻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이 ‘죽어가는 것’이다.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라는 말처럼, 세상 모든 존재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 세상에 대한 겸허와 연민이 생긴다. 윤동주는 세상 모든 존재를 겸허한 연민의 마음으로 사랑하겠다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사는 길이라고 믿었다. 스물네 살의 젊은이가 첫 시집을 준비하면서 이렇게 높고 정결한 마음을 펼쳤다. 이 정결한 발언을 지금 우리가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자신의 다짐을 고백한 윤동주는 독립된 시행으로 그가 처한 상황을 암시적으로 표현했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라고. 밤하늘에서 별이 빛나는 것은 신의 축복과 같다. 밤이 깊어야 별빛이 더 밝게 빛나는 법이다. ‘별이 바람에 스친다’는 말은 바람에 가물거리면서도 빛을 잃지 않는 별의 이중적 상태를 나타낸다. “오늘 밤에도”라는 말은 별이 바람에 스치는 현상이 오늘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늘 그런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풀잎에는 바람이 일고 별에는 바람이 스친다. 세상 모든 일에는 시련이 따른다. 그러나 별이 빛을 잃는 일은 없다. ‘오늘 밤에도’라는 말은 그러한 지속의 의미를 드러낸다. 이것이 어둠 속에서 윤동주를 버티게 한 마음의 동력일 것이다. 자신의 생명이 존재하는 한 별빛은 변함없이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을 그는 지녔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한 이 예민한 자아는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이런 깨달음에 이르렀다.
오늘날 미세 먼지 가득한 상황에서는 밤하늘의 별조차 보기 어렵다. 그러나 자연을 탓하기 이전에, 하늘을 우러를 순수한 마음을 잃은 것이 더 큰 문제다. 혐오와 불신이 가슴에 가득 차서 사랑과 연민이 뿌리내릴 토양이 사라졌다. 윤동주의 별은 바람에 가물거리면서도 사랑의 길을 비추어 주었는데, 지금 우리는 소망과 사랑을 염원할 마음의 별을 잃었다.
윤동주의 이 시를 읽으며 우리는 각자 마음의 별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마음속 어딘가 남아 있는 순수의 기운이 있다면, 그것을 자신이 추구하는 상징의 별로 삼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두 바람에 괴로워하는 존재,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서로 연민과 사랑의 눈길을 주고받기를 소망한다. 가혹한 시대에도 고결한 마음을 갈고 닦은 청년 윤동주의 시를 다시 읽으며, 혐오의 거리에서 벗어나 이해와 화합의 길로 들어서기를 간절히 바란다.
윤동주는 시집 자필 원고를 세 권 만들어서 한 부는 은사 이양하 교수에게 드리고, 또 한 부는 후배 정병욱에게 주고, 한 부는 본인이 지녔다고 한다. 이 중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정병욱의 소장본뿐이다. 그 원고에는 표지에 시집 제목이 있고 다음 쪽에 제목 없이 이 시가 실려 있다. 그러니까 정병욱이 받은 원고에는 이 시의 제목이 없다.
시인 윤동주가 1941년 '서시'를 쓴 육필 원고.
그런데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는 형이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집에 돌아왔을 때 시집 원고에서 ‘서시’란 제목을 분명히 보았다고 증언했다. 그렇다면 윤동주는 정병욱에게 원고 한 부를 건네준 다음에 자신이 갖고 있던 원고에 ‘서시’란 제목을 추가한 것일까? 그 원고가 사라졌기 때문에 사실을 확인할 길은 없다. 1948년 초판본 시집에는 이 시 위에 “서시”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어구가 어색하게 병기되었다. 정병욱 소장본과 윤일주의 증언이 엇갈렸기 때문에 그렇게 처리했을 것이다. 1955년에 재판본이 나올 때 비로소 ‘서시’라는 제목으로 시집 맨 앞에 실렸다.
이런 이유로 이 시의 제목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해야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윤동주가 시집 제목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정해서 표지에 제시했는데 그다음에 나오는 시 제목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일 리는 없다. 그러니 동생 윤일주의 기억에 무게를 실어주는 수밖에 없다. 1955년의 재판본도 그런 취지로 이 시 제목을 정했을 것이다. 그렇게 세상에 알려진 지 70년이 되었고, 더군다나 이 시가 윤동주 시 전편의 성격을 함축하고 있으니, ‘서시’라는 제목이 합당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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