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이라는 나이는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인생의 절반 정도를 거쳐 가는 이 시기에 많은 사람들은 잠시 멈춰 서서 달려온 자신의 인생길을 돌아보게 되는 것 같다. 마라톤으로 치면 반환점인 것이다. 이제 오던 길만큼 삶을 돌아 나와야 한다. 결승점을 향해 돌아 나오는 길, 무슨 생각이 들까?
많은 사람들은 마흔에 겪는 심리적 변화와 신체적 변화에 민감해진다. 나 또한 마흔이 되면서 가히 청소년기의 질풍노도와 못지않는 그런 '감정의 격정기'를 맞은 것 같다. 호르몬의 변화도 있고, 그동안 아이를 키우느라 무시하고 버려둔 내 감정들이 고스란히 살아난다. '나'라는 주최의식이 다시 살아나면서, 나는 어떻게 살고 싶었던 사람인지를 묻는다.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어떤 것도 자기의 모습과 다르게 되는 것을 결코 원치 않는다. 나 자신도 다르게 되고 싶지 않다
우리가 결국 마흔에 갖게 되는 활발한 자아 감각은 결국 잃어버린 채 살아왔던 '나'를 되찾고 싶다는 열망일 것이다. 더 이상 '나 아닌 어떤 모습으로도 살고 싶지 않은 것' 말이다.
죽고 싶은 마음을 돌보며 마음공부를 시작했을 때 나는 수많은 내면의 또 다른 나, '내면 아이'들을 만났다. 그것은 어떤 감정의 형태이고 때론 인격체가 되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요즘 마음공부가 더 깊어져 가는 것을 느끼며 세세하게 올라오는 감정들을 만나고 있다. '진정한 내가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자신 안의 목소리와 마주하는 시간을 가지며 소통하는 것이다.
아파서 보고 싶지 않았던 감정들이 요 며칠 올라와서 한참을 힘들었다. 하지만 그 감정 속에 고스란히 머물면서 과거에 버려둔 내 감정들에게 사랑을 듬뿍 주었다. 무능하고, 게으르고 무기력한 나를 그냥 껴안았다. 계속 침대에 시체처럼 누워 있으면서 무능해서 사라지고 싶다는 그 목소리를 위로했다. 위로받은 그 마음은 머물다가 떠나며 나를 울렸다. 고마웠다. 다시 찾아와 준 그 목소리에.
하루님의 <사랑 작업> 유튜브 채널을 보면서 내가 나를 안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다시 배웠다. '나쁜 마음'이 아니라 '아픈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인지 느낀다. 항상 이 마음은 너무 나빠서, 너무 못돼서 봐주고 싶지 않을 때 그 마음은 지하 감옥으로 버려진다. 버리진 그 아이는 다시 봐주고 수용해 줄 때까지 기다렸다가 올라온다. 슬그머니, 그렇게 슬며시 내게 다가와 자신의 마음을 알아봐 달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요 며칠 사랑 작업을 하면서 다시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지겹도록 더딘 나의 마음 성장이라고 비난을 퍼붓는 자아를 껴안았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또 넘어지며 나를 만난다. 니체가 말한 '내가 아닌 그 무엇도 되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를 가슴에 새기면서, 나는 이렇게 느리고 어설프고 무기력한 나를 나로 받아들였다.
목소리들이 어느 날 하나가 되는 날이 올 것이다. 한 목소리를 가진 나는 그 어느 때 보다 더 크고 눈부시게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을 믿는다. 오늘은 아직도 다 통합되지 못하고 제 각각 이야기를 하는 그 마음아이들을 다독이며 하루를 나아간다. 내가 혹여 혐오스러운 괴물이라도 나는 그냥 그렇게 나를 괴물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먼저 배워야 할 것 같다. 공주처럼 살고 싶은 내 마음 안에 괴물이 살고 있다. 그 괴물 이야기를 좀 들어봐 주는 오늘을 맞기로 한다.
그 아이도 다 자신이 괴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을 테니, 모든 올라오는 마음에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시선을 주리라. 날씨가 맑고 화창해서 한껏 설레는 날이다. 나쁜 마음이 아닌 아픈 마음들에 보송보송 빛나는 햇살을 선물하고 싶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서 많이 아팠지? 괜찮아, 마음껏 넘어지고 머물다 가도 돼. 어차피 너는 사랑이고, 나는 너와 함께 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