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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정원을 장식한
수상한 돌의 정체는?

괴이한 형상의 돌, 괴석(怪石)에 대하여

by YECCO


경복궁이나 창덕궁과 같은 조선시대의 궁을 방문해 이리저리 거닐다 보면,

정원의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괴이한 형상의 돌에 눈이 가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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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괴석 ©심민주

석분 위에 아무것도 없이 돌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어 그 정체가 궁금하면서도,


그중 몇몇은 주위에 울타리까지 두르고 있는 것을 보아,

무언가 중요한 가치를 지녀 귀중히 여겨지는 것 같지요.


이들의 정체는 바로 괴석(怪石)으로,

말 그대로 괴이한 형상을 지닌 돌을 지칭합니다.



괴석(怪石)에 대하여


괴석은 중국으로부터 유입되어 한국과 일본까지 전해진 조경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는데요,


고대 중국인들은 산의 아름다움을 함축해 정원에 표현하기 위해 흙과 돌로 인공 가산을 만들었습니다.

zhang-qc-eZDPYAkhTOk-unsplash.jpg 중국 정원의 석가산 ©Zhang qc

그중에서도 돌을 여러 개 모아 만든 가산을 석가산(石假山)이라고 불렀으며,

석가산이 나타내던 산의 형태를 보다 함축하여 단독으로 놓은 하나의 돌을 괴석(怪石)이라 칭했습니다.


고려 예종 시기, 궁의 정원에 석가산을 꾸몄다는 기록을 통해

이 시기부터 돌을 활용한 조경 문화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대와 문화에 따른 차이


괴석기법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약간씩 차이를 보였습니다.


중국에서 귀하게 여겼던 태호석(太湖石)의 경우

석회암 지대에서 형성되었기에 구멍이 많이 뚫린 복잡한 외형을 지녔습니다.

크기가 거대한 것을 특히 높게 쳤으며, 석가산을 조성하는데 이용되었다고 하죠.


반면, 우리나라 괴석의 경우에는 화강암이 주를 이루었는데요,

특히 개성 부근에서 나는 괴석이 유명하여 연산군 시기,

이들을 캐어 궁으로 가져올 것을 명했다는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개성부(開城府)에 일러서 괴석(怪石) 2백, 등잔석(燈盞石) 3백을 채집하여 바치게 하였다.

- 연산군일기 54권, 연산 10년 6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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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괴석 ©심민주

조선시대의 경우 거대한 돌을 여러 개 모아 만들어낸 석가산보다는,

좁은 정원에 석분(盆)을 놓고, 그 위에 괴석을 하나씩 놓아 꾸미는 방식이 유행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괴석이 의미하는 바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괴석의 의미


괴석은 그 자체로서 신성한 산을 상징하는 동시에,

긴 세월과 그 세월을 견뎌낸 불변성을 상징했습니다.


더 나아간다면, 괴석이 산수화에서 다루는 와유(臥遊)의 기능을 수행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사계절 산수_PS0100100100500314400000_0.jpg 안견 <사계절 산수> ©국립중앙박물관

선비들이 괴석을 통해 집이라는 현실의 공간에 자연을 들여, 바깥세상에 발을 딛지 않고도,

불로불사 하는 신선이 자유롭게 노니는 자연을 유람했다고 보는 것이지요.



좋은 괴석의 판단 기준


조선시대에는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형상이 조화를 이루어 산의 이미지를 잘 표현하며,

연륜이 있어 보이는 괴석을 '좋은 괴석'이라고 평가했습니다.

thomas-chizzali-FXez89p9Yaw-unsplash.jpg ©Thomas Chizzali

더불어, 습기를 머금을 수 있는 돌의 능력을 귀하게 여겼는데요,

앞서 언급한 자질들을 갖추는 동시에, 물을 끌어올려

이끼와 화초를 가꿀 수 있도록 하는 괴석을 으뜸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괴석의 흔적 찾기


현대에 이르러 괴석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에 비해,

과거의 기록들에서 괴석은 그 존재감을 가득 뽐내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괴석이 뇌물의 내역에 포함되기도 했다는 기록과 더불어,

왕실과 사대부들이 괴석을 놓아 정원을 꾸미는 것을 질책하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양인(良人) 강유련(姜有連)·한치강(韓致江)·한치명(韓致明)·고석숭(高石崇)은 김정광에게 당등좌(唐㽅坐) 1벌[事], 괴석(怪石) 1개, 유대로(鍮大爐) 1개, 유접자(鍮楪子) 20개, 유대접(鍮大楪) 10개와 유로(鍮爐)로서 보통 것·작은 것 아울러 3벌[事]을 뇌물로 주고 추포(麤布) 38필을 바쳤고...

- 성종실록 6권, 성종 1년 7월 6일
아무리 먼 곳이라도 기화(奇花)·괴석(怪石)이 있으면 가져와 꾸미는 상황이니, 시대 풍조가 이렇게까지 된 것이 정말로 한심스럽습니다.

- 선조실록 188권, 선조 38년 6월 17일


괴석은 <동궐도>에서도 모습을 드러내는데요,

대조전부근확대도.jpg <동궐도> 대조전부근확대도 ©고려대학교박물관

창덕궁 대조전 후원 한가운데, 괴석이 올라간 석분 3개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선비들이 소중히 여기던 괴석은 그림의 단골소재이기도 했습니다.

조선후기 사대부 출신의 화가 정학교는 괴석을 주로 그리며 명성을 떨쳤죠.

괴석도_PS0100100800106868800000_0.jpg 정학교 <괴석도> ©국립전주박물관
괴석매죽도 8폭 병풍_PS0100500300400006800000_0.jpg 정학교 <괴석매죽도 8폭 병풍> ©서울대학교박물관

이러한 흔적들을 통해 괴석이 조선의 양반 사회에서 지닌 가치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데요,



글을 마무리하며, 조선의 22대 임금 정조가

원하던 괴석을 구한 뒤 작성한 <태호석기(太湖石記)>의 문장들을 몇 개 가져와봤습니다.


동정(洞庭)의 서쪽에서 나는 돌을 태호(太湖)라 하는데,

내가 이것을 매우 열심히 구해 오다가, 갑오년 봄에 이것을 고원(古苑)에서 얻어 가지고 깨끗이 씻어 밝은 창문 앞에 놓아두니,

이 주먹만 한 크기의 돌 하나가 일천 암벽(巖壁)의 빼어남을 능히 다 온축하였다.

그리고 태호석의 경우는 또 천하의 뛰어난 기석(奇石)이므로, 크게는 원(園)이나 관(館)을 꾸밀 수 있고, 작게는 궤안(几案)을 꾸밀 수 있으며, 혹은 물에도 잘 어울리고, 혹은 산에도 잘 어울린다.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인(仁)한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智)한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 하였는데, 인한 사람과 지한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정원(庭園)에서 한꺼번에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태호석만이 그러하니, 이것이 바로 내가 태호석을 취한 까닭이다.

- 홍재전서 4권, 춘저록 <태호석기> 발췌




[참고]

전영옥. (2004). 조선시대 怪石의 특성과 산수화와의 관련성에 관한 연구. 한국전통조경학회지, 22(2), 1-12.

윤영조, 윤영활. (2010). 한국 전통 석가산의 유형과 역사적 변천. 한국조경학회지, 38(3), 83-97.

국가유산청. (2017). 태초의 신비로움을 간직한 괴석과 절제미를 담은 허련의 <괴석도>. 국가유산청 소식지 국가유산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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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CCO 콘텐츠팀 심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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