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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란비, 조선의 여름을 적시다

조선 시대 장마 이야기

by YECCO

어김없이 장마가 찾아왔네요. 여름철, 보통 6월 하순에서 7월 하순 사이에 지속해서 내리는 비를 가리켜 '장마'라고 합니다. 올해 장마는 가볍게 지나가는 듯하더니 7월 중순이 넘어서야 천둥 번개와 함께 몰아치고 있는데요.


우리 역사에서도 장마로 인한 피해가 자주 기록되어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보면 조선 시대만 해도 한양을 중심으로 총 176회에 달하는 홍수가 발생했으며, 이 중 70%는 7, 8월에 집중되었다고 합니다.


오늘은 조선 시대 장마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당시 사람들은 장마를 어떻게 생각하고 또 대비했는지 알아보면서 조선의 여름을 적시던 빗줄기들을 상상해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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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i / ©Jashan Gill



여러 날 오래 내리는 '오란비'


장마의 옛말은 오란비입니다. '오래'라는 뜻의 고유어 '오란'과 '비'를 더한 말인데요. 한자로 기록된 조선왕조실록에는 비가 많이 내리는 것을 임우(霖雨)라고 했습니다. 임우의 임(霖)은 오늘날 '장마 림/임'으로 불리는 한자어입니다만 1527년에 나온 한자 교습서 '훈몽자회'에 보면 '임(霖)'을 '장마 림'이 아닌 '오란비 림'으로 풀어내었으니 조선 시대 사람들은 장마보다 오란비라는 말을 썼을 것으로 보여요.


한편 '장마'는 16세기 문헌에서 '댱마'로 나타나고, 구개음화가 된 '쟝마'는 18세기 문헌부터, '장마'는 19세기 문헌부터 나타나 현재에 이릅니다. 참고로 장마는 '길다'는 뜻의 한자 '장(長)'과 물의 고유어인 '맣'의 합성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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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의 원인이 결혼을 못 해서라고?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성종 9년, 장마의 원인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종실록(1478년 6월 13일 자)에 “요즘 장마가 몇 달을 개이지 아니하니, 아마도 처녀가 가난하여 제때 출가하지 못해서 시집을 제때 못 간 한이 혹 화기를 범한 듯하다. 혼숫감을 넉넉히 주어서 시기를 놓치지 않게 하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장마가 몇 달 동안 멈추지 않고 지속되자, 집이 가난해 시집, 장가를 가지 못한 억울한 한이 화를 일으켜 장마가 지속된다고 생각했던 것인데요. 이 한을 풀어줘 장마를 끝내기 위해 국가에서 직접 나서 혼수품 등을 마련해주며 처녀, 총각의 결혼을 적극적으로 장려했습니다.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이지만, 당시 선조들의 인식과 더불어 천재지변에 사회 문제를 자연스럽게 녹여낸 조선 정치의 재치가 엿보이기도 하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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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혼례 ©우리역사넷 / <시골 결혼 잔치> ©엘리자베스 키스



조선 시대에도 기상청이 있었다


그렇다고 조선 시대 과학 기술이 형편없었다고 생각하는 건 금물! 조선 시대에도 오늘날 기상청과 같이 날씨 변화를 예측하던 곳이 있었으니, 바로 '천체가 변하는 여러 현상을 관측한다'라는 뜻의 관상감입니다. 원래 고려 때 세워진 서운관이 조선 시대에 계속 운영되다가 1466년 세조 때 '관상감'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요. 이곳의 관리들은 천문학에 대한 교육을 받고서, 천체를 관측하고 이에 따른 천체와 날씨를 예측했어요. 하늘을 숭배하고 농사를 짓던 당시 조선에서 이들의 책임은 막중했겠죠.


그래서 기상을 바로 맞추지 못한 관리는 근무평정 점수가 깎이기도 했고요, 일식이나 월식을 정확히 맞춘 관리는 말이나 비단 옷감을 상으로 받기도 했습니다. 세종실록(1431년 6월 3일 자)에 보면 “서운관이 날이 흐리고 구름이 이는 것만 보고, 유성의 변하는 것은 살피지 아니하오니, 청하건대 장 600대를 치옵소서”라는 기록도 있어요. 날씨를 맞히지 못해 왕에게 혼쭐이 나다니, 과학 기술의 한계가 여실했을 당시 관리들이 억울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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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감 관천대 보물 지정보고서 ©국가유산포털 / 기상정보가 담긴 1615년 8월 승정원일기 초고 ©국사편찬위원회



왕이 장마를 대하는 태도


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왕 역시 장마의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답니다. 조선 시대 왕들은 장마로 인한 피해를 왕인 자신의 덕이 부족해 일어난 것으로 생각해야 했습니다. 왕의 덕이 뛰어나면 태평성대가 펼쳐진다는 유교 사상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따라서 장마로 인한 피해가 극심해질 때면 왕은 감선(減膳)을 시행했습니다.


감선이란 천재지변과 같은 국가적 어려움이 발생했을 때 왕이 자신의 식사량이나 음식의 종류를 줄이는 행위를 말합니다. 통계에 따르면 조선 왕조를 통틀어 27명의 왕이 319회의 감선을 했다고 하니, 단순히 계산해도 한 명당 11회 정도 감선을 했던 셈이죠. 이는 백성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고자 하는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조선 시대 왕이 가진 권력의 근본은 결국 백성임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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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임금 수라상 ©조선궁궐



장마철이 되면 사대문을 보아라


조선 시대 사람들은 장마철이 되면 사대문을 들여다보곤 했는데요. 당시 사대문은 단순한 통로를 넘어 당시 사람들의 먹고사는 일, 즉 농업의 풍흉이 직결되었기 때문입니다.


농업 사회에서는 비가 내리지 않는 가뭄과 비가 너무 많이 내리는 홍수가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이를 막고자 하늘에 제사를 지내곤 했는데, 바로 이 제사들이 도성의 사대문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기우제는 많은 분이 익숙하게 들어보셨을 것 같아요. 비가 내리지 않아 흉년이 예상될 때 비가 오도록 기원하는 제사입니다. 이와 반대로 장마가 계속되어 흉년이 예상될 때, 비가 멈추기를 기원하며 지냈던 제사를 기청제라고 합니다. 기청제는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이어진 의례로, 고려 시대 예법을 따라 문마다 3일 동안 매일 한 차례씩 제를 지내고, 장마가 그치지 않으면 3일 동안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우제에 비하면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사대문에서 행해지는 기청제는 장마가 얼른 그치길 바라는 백성의 염원을 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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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조선 시대에는 가을이 되면 숭례문(사대문 중 남대문)을 열고 장터를 설치하는 것이 관례였는데요. 가을이 되기 전이라 해도 장마가 계속되면 숭례문을 활짝 개방했습니다. 음양오행설에 따라 비가 가진 음의 기운을 막으려면 양의 기운을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남대문인 숭례문은 양의 기운을 들여온다고 믿어졌기에 활짝 열고, 반대로 북대문인 숙정문은 닫아놓았던 것이죠.


그럼 가뭄 때는 어떻게 했을까요? 짐작하셨듯이, 숭례문을 폐쇄하고 숙정문을 열었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장마철이 되면 염려한 표정으로 사대문을 들여다보곤 했을 조선 시대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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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장마철 최대 골칫거리, 청계천


장마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조선 시대에도 큰 피해를 안겨주었는데요. 그중 가장 큰 골칫거리는 단연 청계천의 물 넘침(범람)이었다고 합니다. 한양 주위에는 인왕산, 북악산, 낙타산(오늘날 낙산), 목멱산(오늘날 남산)의 4개 산이 있습니다. 여름 장마철이 되어 이 산들로부터 흘러내린 물들이 한양 중심에 있는 청계천으로 흘러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물은 많은 양의 흙과 함께 쓸려 내려와 청계천에 쌓였고 이에 청계천 바닥이 높아지면서 한양 한가운데 물이 흘러넘치게 됩니다.


태종은 도성 주위 산에서 벌목을 금지하고, 청계천 주변에 둑을 쌓았지만, 장마철에 청계천 범람을 막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근본적으로 청계천 바닥의 흙을 퍼내는 대규모 정비작업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태종 대 시작된 청계천의 정비 사업은 세종 대 1422년과 1434년, 두 차례에 걸친 대규모 토목공사를 통해 마무리되었습니다. 청계천으로 흘러들어오는 물길 바닥을 깊게 파내고, 민가 주위에 더 많은 도랑을 파 물길의 수를 늘렸으며, 한양 성벽에 물이 빠져나갈 수구문을 늘려 물이 빠르게 빠져나가도록 했습니다.


약 200년이 지나 영조 대에 이르러 다시 한번 청계천 준설제방 사업이 시작됩니다. 이는 조선 최대 규모의 건설 사업으로 꼽히는데, 이후 정기적인 공사가 이루어지도록 제도화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습니다. 이에 따라 정조, 순조, 고종 대에도 청계천 정비 사업이 진행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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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도-한양도 ©서울역사박물관 / 영조 대 청계천 준설공사 모습 ©준천계첩



장마는 늘 사람들을 걱정시킵니다. 조선 사람들도 지금의 우리처럼 흐린 하늘과 세찬 빗줄기에 근심했죠. 하지만 그 시절 장마는 사람들을 한데 모이게 하기도 했습니다. 함께 모여 고민하고, 제사를 지내고, 물길을 정비하던 조선의 사람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서로를 살피고 도와 올해 장마철 큰 피해 없이 잘 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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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CCO 콘텐츠팀 민예은


[참고]

천지일보, 백은영 기자. 2022.6.27. '어김없이 찾아오는 장마 '오란비'가 왔다'

https://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995611

천지일보, 장수경 기자, 2020.8.11. [문화곳간] 조선시대 장마철, 천문학자는 '노심초사'

https://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767174

우리문화신문, 이창수 기자, 2025.7.01. '여러 날 오래 내리는 비 오란비'

https://www.koya-culture.com/news/article.html?no=149374

채널PNU, 함규진 서울교육대 윤리교육과 교수, 2016.9.5. '제왕의 식탁, 대통령의 식탁'

https://channelpnu.pusan.ac.kr/news/articleView.html?idxno=5605

기청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8456

오마이뉴스,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374화, 2013.5.6. '조선시대 장마 대책이 숭례문 개방?'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62256

KBS WORLD RADIO 역사-조선시대 한양의 치수사업, 2013.8.3.

https://world.kbs.co.kr/service/contents_view.htm?lang=k&menu_cate=history&id=&board_seq=47078&page=27&board_code=

이상배, 한국중앙사학회, 중앙사론제30집(2009.12), 조선시대 도성의 치수정책과 준설사업

https://www.earticle.net/Article/A117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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