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적인 자아상에 대하여.
겨울 햇살은 유달리 따뜻하다. 겨울의 귀한 햇살은 환하고 따스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냥 그렇게 믿고 싶어 진다. 가만있자, 그래서 (띄엄띄엄 친절한) 츤데레 스타일이 인기가 좋은 건가? 왠지 내면은 따뜻함으로 꽉 차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감을 품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뻔히 들여다보이는 선물상자는 재미가 없으니까. 짜잔! 하며 기쁨을 주는 사람과, 우와! 하며 기쁨을 기꺼이 받는 사람이 있어서 우리는 어김없이 따뜻해진다.
쏟아지는 햇살로 인해 낮의 실내는 겨울인지도 모르게 지나가지만 아침저녁으론 겨울 냄새와 함께 걷는다. 아이의 표현에 따르면 (뚱뚱한 점퍼 때문에) 근육맨이 되었다는 두꺼운 외투를 입고 등교를 한다. 교실에 들어서면 당연히 외투를 벗겠거니 했다. 불편하고 더울 테니까. 벗어놓은 외투에 땀냄새가 많이 나는 날에는 탈탈 털어 햇빛 샤워를 시키곤 했는데 어느 날 외투에서 밥풀을 발견하고, 또 어느 날은 노란 카레 자국이 '나 여깄네.' 하며 손을 흔들었다.
"온아, 혹시 근육맨 점퍼를 입고 점심밥을 먹은 거야?"
"응"
"덥진 않았어? 수업시간엔 불편할 것 같은데."
"더울 때도 있는데 계속 덥진 않아. 왜냐면 선생님이 코로나 때문에 창문 열어두거든. 환기시킨다고."
"옷이 뚱뚱해져서 학교에서 생활할 때 불편하진 않아?"
"어차피 학교는 원래 매일 불편한데? 아 맞다! 1학년 때는 아니야."
단호하게 말하는 아이의 입 끝이 어쩐지 샐쭉하다.
올해 둘째 아이의 담임이 무섭고 강압적인 선생님임을 알고 있었던 터라 겨우 2학년인 아이의 말이 따끔했다. 마음이 쉬이 지나쳐지지 않았다. 혼나는 친구들은 매일 있지만 칭찬받는 친구들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있다고 했다. 선생님은 친구들에게 화만 낸다고. 본인이 혼나지 않더라도 아이들은 같은 공기를 힘겹게 삼키고 있었다.
마음을 여는데 시간이 걸리는 아이에겐 (어른에게도) 따뜻한 겨울 햇살이 필요하다. 선생님의 관심 어린 말 한마디, 성취하고 인정받으며 얻는 자기효용감, 부모로부터 전해지는 믿음, 친구와의 유대감, 조용히 내려다보던 햇살이 모이고 마음을 녹여 움직이게 한다. 아이들이 느끼는 교실이 따뜻한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쌀쌀한 날씨가 무색하게 웃음으로 온기를 채우며 아이들의 마음의 온도도 체크할 수 있는 선생님을 꿈꾸는 건 욕심일까?
환기로 인해 창문을 열지만 아이들이 춥다고 하면 어느 선생님이 창문을 안 닫아주겠냐마는 포인트는 말을 할 수 있는 분위기다. 자유롭게 의견을 말하며 존중받는 교실이 있고 수업에 관계없는 이야기를 했을 때 눈총을 받는 교실이 있다. 차가운 공기 속에도 따뜻한 교실과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도 추운 교실의 차이다. 유연하게 사고하며 생각을 확장시킬 수 있어야 학습의 주체가 되어 즐길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마음을 열어야 한다.
등교하는 내내 찬 바람에 웅크렸던 몸과 마음을 펼치고 모두가 유일한 존재로 피어나는 교실을 꿈꾼다.
학교를 다녀온 아이들은 가지런히 가방을 내려놓고 수저통과 물병을 싱크대에 올려두었다. 외투를 벗어 소파에 걸쳐두곤 화장실로 직행하여 손을 씻고 양치를 한다. 아이들의 몸에 밴 루틴의 마지막 관문은 실내복으로 갈아입기이다. 오늘은 조금 있다 나갔다 와야 하니까 겉옷만 벗고 있으라고 해도 굳이 갈아입는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고 우리 집인 것 같다나 뭐라나.
실내복을 입은 아이들은 간식을 먹고, 마치 '해방이다!' 하고 외치듯 방으로 후다다닥 뛰어 들어간다. 조잘대며 키득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엔 편안함이 서려있고 장난기가 묻어났다. 학교에서 가졌던 긴장을 가방과 함께 내려놓고 마음을 이완시킨 아이의 표정은 밝고 거침이 없다. 학교에선 말하기 전에 예상해 보고 고민한 뒤 표현하였다면, 집에선 한 단계의 과정이 줄어들며 자유로운 표정과 말이 나오는 것이었다. 실수해도 상관없을 가족이고 집이니까. 못생긴 표정을 지어도, 모자람이 있어도 지적하지 않는 가족이라서. 되려 부족함을 채워주는 공간이기에 문을 열고 들어서면 노곤해진다.
집. 우리 집에 왔다.
십분전엔 투닥투닥 말싸움을 하더니 또 뭐가 그리 즐거울까? 깔깔거리며 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배경음악 삼아서 사부작사부작 저녁 준비를 하고 있던 오후였다. 큰 아이가 주방으로 오더니 복숭아빛 얼굴로 환하게 말을 걸었다.
"엄마, 비밀 말해줄까? 나는 목소리가 두 개야!"
"응? 지인짜?"
"무슨 말인지 알아? 엄마는?"
"당연하지. 엄마도 몇 개인지 헤아려봐야겠어. 왠지 너보다 더 많을 것 같은데? "
"나는 집에선 이 목소리잖아. 근데 학교에선 부산말도 안 쓰고 서울말도 아니고 그 중간쯤이야. 그리고 지금보다 목소리가 낮아. 생각을 해서 차분하게 말하거든. 전에 창의 크리에이터 수업 시간에 '자기만의 영상 찍어서 편집해서 오기' 숙제가 있었잖아. 내가 찍은 영상을 보고 나서 친구들이 "너 목소리가 네가 아닌 것 같아."라고 말하는 거야. 아! 그러고 보니 두 개가 아니네. 3개다!!!! 푸하하 영상 찍을 땐 또 아나운서 같은 목소리로 말하니까. "
"사람은 누구나 그래. 안 그런 사람도 있을까?"
"정말?"
"응. 편한 사람에게는 기대고 싶을 때도 있고 가끔 볼멘소리로 투덜대기도 하잖아. 그럴 때 내는 목소리를 낯선 사람에게 내진 않잖아. 어른도 마찬가지야. 회사에 가서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목소리를 집에 와서도 똑같이 내는 사람은 흔치 않을걸? 그렇지만 나쁜 건 아니잖아. 왜냐면 우리는 아니까. 시시콜콜한 마음들을 공 튀기듯 주고받으며 놀 수 있으니 편한 거 아닐까. 주고받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면 목소리가 경직돼. 그렇지?
많은 관계 속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건 생각과 마음이 살아 움직인다는 거야. 꼭 같은 목소리로 하나의 너만 표현해야 되는 건 아니란다. 괜찮아."
아이는 나를 쳐다보며 의견을 구하는 듯했다. 아마도 "왜? 왜 두 갠데?"라고 물었거나, "학교랑 집에서 다르게 행동하면 안 되지." 라며 지적을 했다면 아이는 생각이 깊어져 불안해졌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랬다. 내가 주체가 되는 곳에선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다가도 겉도는 듯한 느낌이 들 땐 바람 빠진 풍선처럼 피식거렸다. 집에선 엄마 말을 귓등으로 흘려 답하면서도 학교에선 친구의 마음을 공감하며 이야기를 끝도 없이 이어갔다. 여기선 희희낙락, 저 기선 의기소침, 어떤 게 진짜 나일까? 누구도 정해놓을 순 없어.
깨어나는 것부터 의지가 필요해. 우리는 그때부터 작은 용기를 펜 삼아서 오늘의 나를 그려나가는 거야.
힘들거나 약한 모습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안전한 환경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실패와 비판으로부터 도망치는 대신 시련을 통해 배우고 성장한다. 심리적으로 안전한 환경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배움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에 대한 실망을 자아에 대한 탐구로, 찡그린 표정을 웃음 가득한 얼굴로 변화시킬 수 있다. -탈 벤 샤하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