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갈린 사랑의 허기짐.
엄마가 오셨던 어느 기쁜날이었다. 지하주차장으로 짐 가지러 내려오라는 부름에 설렁설렁 내려가면 엄마 차의 보조석과 트렁크엔 늘 빼곡히 먹을 것이 쌓여있었다. 아이구야 또 장까지 봐오셨다.
"엄마 너무 많아요. 우린 많이 안 먹어서 남겨서 버리게 된다니까요."
식탐이 없고 입도 짧고 비위도 약한 나에겐 많이 먹으라는 말이 은근히 스트레스였다.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은 즐겁고 행복하지만 아무리 맛있어도 많이는 못(안) 먹는다. 그래 놓곤 이제 내 새끼들한테는 많이 먹으라는 말을 한다. 이렇게도 이중적이다.
언제부턴가 친정보다 내 집이 훨씬 편해졌다. 5성급 호텔을 다녀와도, 늦은 시간 집에 들어와 불을 키는 순간 "아 우리 집이 최고야."라고 내뱉게 된다. 마음의 평온은 그럴 때 찾아왔다. 어떤 규칙이나 예의를 지키지 않아도 되며, 상대를 의식하여 행동하지 않아도 될 때.
엄마의 낙원은 늘 그리운 곳이지만, 지나친 희생이 송구하고 때론 갑갑했다. 엄마의 완벽함과 나의 느슨함은 도무지 맞춰지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앉아 느린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었다. 뜨거운 커피가 완벽히 식을때까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엄마는 커피를 마시며 집안을 스캔하고, 해야 할 집안일을 정하고, 오는 전화를 받고, 다시물도 우린다. 하고싶은 이야기가 많았는데, 부지런한 엄마의 틈을 찾다 지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돌아선적이 많았다.
엇갈린 사랑의 허기. 나는 엄마의 느슨한 사랑이 고팠고, 어른이 된 지금도 그 사랑에 가끔 목이 마른다. 완벽함을 지향하는 엄마는 나의 물렁함이 맘에 차지 않아 어렸을 적부터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부단히 애쓰셨던걸까. 나는 배 깔고 누워서 책 읽으며 시 쓰는 게 좋았고, 엄마는 내가 반장을 하거나 대회에 나가서 상 받아오는 걸 원하셨다. (발표조차 하기 부끄러웠던 어린 나는 직책을 맡을 때면 긴장으로 똘똘 뭉쳐져 로봇처럼 굳어갔는데... )
엄마가 학교 운영위원회장이 되면서 나는 표창장을 받기 시작했고, 상의 개수는 늘어났음에도, 받는 기쁨은 차츰 줄어들었다. 수학을 몹시 좋아했던 나는 경시대회 등에서 상을 받았고, 그것은 오롯이 스스로 애써서 해낸 것이기 때문에 뿌듯했던 나만의 전유물 같은 것이었다. 소심한 내가 유일하게 뽐낼 수 있었던 무엇!
그 빛나는 나의 상들이, 매 학기마다 어김없이 주어졌던 표창장 때문에 퇴색되기 시작했다. 나는 표창장이 싫었다. 친구들이 "너 왜 표창장 받아?"라고 물으면 정말이지 할 말이 없었다. (그땐 나도 몰랐으니까.) 열심히 풀어서 쟁취한 수학상이, 마음을 다해 글을 써서 받은 독서감상문상이 좋았다. 그뿐이었다.
엄마는 데자뷔처럼 또 냉장고를 연다. 또 데자뷔처럼 마법이 일어난다. 냉장고는 깨끗이 정리되고, 반찬들과 식자재들은 각자의 자리에 정갈하게 놓여있다. 파들은 가지런히 썰어져 냉동실로 옮겨지고, 다져진 대용량의 마늘이 냉동실에 자리 잡는다. 아! 물론, 아직도 멀었다. 닭봉을 우유에 재우고 소스를 만들고, 김밥 재료를 손질한다. 중간중간 다용도실에 분리수거 점검도 하면서, 쓰레기 버리러 일층에 잠시 다녀오시겠단다. 몇 번을 만류해도 소용이 없다. 엄마의 사랑과 보살핌은 냉장고로부터 시작된다.
엄마의 열정과 부지런함을 나는 닮지 않았다. (난 멍때리기 왕이니까.) 더 해주지 못해 늘 마음이 부산한 엄마를 보면 먹먹하다. 먹먹함에 찡해져서 사랑을 표현하려 하면, 어김없이 잔소리가 한발 빠르다.
딸 집에 오신 날이면 새벽부터 일어나 사부작사부작 주방에서 아침 준비를 하신다. 세상에! 아침 준비하시며 분리수거 버릴 준비도 싹 해놓으셨다. 빨래도 돌리고, 이부자리 정리도 이미 끝났다. 엄마는 사실 가제트 팔이 있는 것이었다. 나와라 가제트 팔! 슥슥 팔을 뻗으면 뭐든지 뚝딱 쉽게 되는 것.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십 분 사이에도 수십 번, 몸을 움직이며 부지런을 떠는 엄마의 팔과 다리는 삐그덕거린다. 주름은 늘고 손도 거뭇거뭇해지고 있다. 언제나 정갈하고 하얗고 예뻤던 엄마는 이제 누가 봐도 할머니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시간의 궤적속에 흩어져 있던, 감사함, 서운함, 옳고 그른 자잘한 기억의 편린들을 이어서 붙여본다. 형언할 수 없는 뜨거운 감정들이 나를 통과하며 아물고, 여물어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