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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예또 Jan 24. 2023

29. 당근인지 채찍인지는 씹어봐야 안다.


 내가 근무했던 센터는 서울 및 수도권에 직영점을 스무 군데 이상 가지고 있는, 헬스업계에서 나름 규모를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헬스업계 특성상 트레이너의 빈번한 퇴사 및 이직은 이곳에서도 골칫거리 중에 하나였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총괄 PT매니저(약칭 GM)가 내놓은 해결책이 바로 <트레이너 육성 코스>였다. 쉽게 말하자면 이리저리 자기 입맛 따라 돌아다니는 경력직 트레이너만 채용하지 말고, 떡잎 바른 새싹을 데려다가 우리 입맛대로 잘 키워서 회사에 제대로 심어보자는 뜻이었다.


 GM을 처음 만난 날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키가 190이 넘는 장신에 운동까지 하는 사람이다 보니 몸이 정말 거대했다. '사람이 이렇게도 거대할 수가 있구나.'라는 걸 나는 그를 통해 처음으로 느꼈다. 그와 함께 서있으면 꼭 사람이 아니라 산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직급 차이와 몸집 차이인데, 거기에 모자라 강압적인 태도까지 갖춘 그는 나를 한없이 주눅 들게 만들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 그는 내게 운동 이론에 관한 질문을 이것저것 하다가 대뜸 이런 말을 내뱉었다.


 "너 멍청이냐? 얘가 왜 이렇게 멍청해."


 나는 느닷없이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이 벙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 사람의 교양에 대해 판단을 해야 할지 엄두도 나지 않았다. 반말에, '너'라는 호칭에, 멍청하다는 폭언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처음 회사에서 만난 직장 상사에게 들을 수 있는 말 치고는 선을 넘어도 한껏 넘은 발언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사람과 처음 만난 지 10분 만에 느낀 이 감정은 단언 '수치심'이었다.


 만나자마자 멍청하다는 소리를 듣는 일은 나의 예상에 전혀 없던 일이라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 발언의 부당함에 대해 따지고 들기엔 나는 이 분야에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하룻강아지에 불과했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에게 자존심을 굽혀야 할 때라는 판단이 들었다. 나는 기분이 상한 것을 숨기고 애써 순진한 미소를 얼굴에 뗬다. 그러자 그가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욕해도 좋다고 헤헤거리네."



 나는 그날 집에 돌아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걸 그만둬? 참아? 어떻게 하지?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오늘 배운 교육 내용의 퀄리티가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어디 가서 듣지 못할 알짜배기 정보인 점도 부정하긴 어려웠다. 첫 만남에 폭언을 서슴지 않고 내뱉은 사람인데도 이상하게 정이 갔다. 뭐랄까, 그런 말을 들었어도 막 사람 자체가 싫지는 않았다. '하루만 더 버텨보고 진짜 안 되겠으면 그만두자.'라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게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자 나는 어느새 진심으로 그를 믿고 따르고 있었다.


 첫 만남에 그런 식으로 행동을 하는 건 일종의 신고식인 셈이었다. '고작 이런 대접에 기분 나빠서 포기할 사람이면 내가 여태까지 몸으로 부딪혀서 배운 특급 비결들을 배울 자격도 없다.'라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그를 더 깊게 알고 나니 언사는 거칠고 투박했지만 속마음은 여린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겉모습은 장군도 이런 장군은 없을 것 같은데 간혹 가다 사춘기 소녀 같은 섬세한 성격이 무심코 튀어나올 때도 있었다. 내가 진심으로 그를 나의 멘토로서 믿고 따랐던 이유는 이러한 반전매력 역시 한몫했지만 그보다도 중요했던 건 그가 진심으로 내가 잘 되길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약 한 달 동안 그의 일명 <트레이너 육성 코스>를 1등으로 우수하게 졸업하고 다시 원래 소속대로 전 센터로 돌아갔던 내가 한동안 잘 적응하는 듯하다가 결국엔 이 사달을 내고 말았던 거였다. 나는 그의 연락을 받고 나자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내가 아무리 그의 사람일지라도 이런 식으로 당일사직을 한 이상 꾸지람은 피하기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이렇게 끝을 내버린 이상 더 두려워할 일이 또 뭐가 있으랴. 나는 구차한 변명도, 알량한 핑계도 대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사직을 하게 되어 죄송하다고 진심으로 그에게 사죄의 말씀을 드렸다.


 그에게 되돌아올 문자가 두려웠지만 욕먹을 일이라는  미리 깨달아서 그랬는지 오히려 어떤 소리를 들어도 크게 충격받을  같진 않았다. 사실은 혼나는  두려웠다기보단 나를 전적으로 응원하고 지지해  사람에게 실망감을 안겨 줬다는  나는 면목이 없었다. 오늘 내가 저지른 일을 후회하고 있을  핸드폰에서 알림이 울렸다. 그에게서  연락을 확인한 나는 잠깐 내 눈을 의심했다. 정말이지 이건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답변이었다.


 잘했다. 그동안 참는다고 수고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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