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근무했던 센터는 서울 및 수도권에 직영점을 스무 군데 이상 가지고 있는, 헬스업계에서 나름 규모를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헬스업계 특성상 트레이너의 빈번한 퇴사 및 이직은 이곳에서도 골칫거리 중에 하나였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총괄 PT매니저(약칭 GM)가 내놓은 해결책이 바로 <트레이너 육성 코스>였다. 쉽게 말하자면 이리저리 자기 입맛 따라 돌아다니는 경력직 트레이너만 채용하지 말고, 떡잎 바른 새싹을 데려다가 우리 입맛대로 잘 키워서 회사에 제대로 심어보자는 뜻이었다.
GM을 처음 만난 날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키가 190이 넘는 장신에 운동까지 하는 사람이다 보니 몸이 정말 거대했다. '사람이 이렇게도 거대할 수가 있구나.'라는 걸 나는 그를 통해 처음으로 느꼈다. 그와 함께 서있으면 꼭 사람이 아니라 산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직급 차이와 몸집 차이인데, 거기에 모자라 강압적인 태도까지 갖춘 그는 나를 한없이 주눅 들게 만들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 그는 내게 운동 이론에 관한 질문을 이것저것 하다가 대뜸 이런 말을 내뱉었다.
"너 멍청이냐? 얘가 왜 이렇게 멍청해."
나는 느닷없이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이 벙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 사람의 교양에 대해 판단을 해야 할지 엄두도 나지 않았다. 반말에, '너'라는 호칭에, 멍청하다는 폭언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처음 회사에서 만난 직장 상사에게 들을 수 있는 말 치고는 선을 넘어도 한껏 넘은 발언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사람과 처음 만난 지 10분 만에 느낀 이 감정은 단언 '수치심'이었다.
만나자마자 멍청하다는 소리를 듣는 일은 나의 예상에 전혀 없던 일이라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 발언의 부당함에 대해 따지고 들기엔 나는 이 분야에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하룻강아지에 불과했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에게 자존심을 굽혀야 할 때라는 판단이 들었다. 나는 기분이 상한 것을 숨기고 애써 순진한 미소를 얼굴에 뗬다. 그러자 그가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욕해도 좋다고 헤헤거리네."
나는 그날 집에 돌아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걸 그만둬? 참아? 어떻게 하지?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오늘 배운 교육 내용의 퀄리티가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어디 가서 듣지 못할 알짜배기 정보인 점도 부정하긴 어려웠다. 첫 만남에 폭언을 서슴지 않고 내뱉은 사람인데도 이상하게 정이 갔다. 뭐랄까, 그런 말을 들었어도 막 사람 자체가 싫지는 않았다. '하루만 더 버텨보고 진짜 안 되겠으면 그만두자.'라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게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자 나는 어느새 진심으로 그를 믿고 따르고 있었다.
첫 만남에 그런 식으로 행동을 하는 건 일종의 신고식인 셈이었다. '고작 이런 대접에 기분 나빠서 포기할 사람이면 내가 여태까지 몸으로 부딪혀서 배운 특급 비결들을 배울 자격도 없다.'라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그를 더 깊게 알고 나니 언사는 거칠고 투박했지만 속마음은 여린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겉모습은 장군도 이런 장군은 없을 것 같은데 간혹 가다 사춘기 소녀 같은 섬세한 성격이 무심코 튀어나올 때도 있었다. 내가 진심으로 그를 나의 멘토로서 믿고 따랐던 이유는 이러한 반전매력 역시 한몫했지만 그보다도 중요했던 건 그가 진심으로 내가 잘 되길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약 한 달 동안 그의 일명 <트레이너 육성 코스>를 1등으로 우수하게 졸업하고 다시 원래 소속대로 전 센터로 돌아갔던 내가 한동안 잘 적응하는 듯하다가 결국엔 이 사달을 내고 말았던 거였다. 나는 그의 연락을 받고 나자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내가 아무리 그의 사람일지라도 이런 식으로 당일사직을 한 이상 꾸지람은 피하기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이렇게 끝을 내버린 이상 더 두려워할 일이 또 뭐가 있으랴. 나는 구차한 변명도, 알량한 핑계도 대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사직을 하게 되어 죄송하다고 진심으로 그에게 사죄의 말씀을 드렸다.
그에게 되돌아올 문자가 두려웠지만 욕먹을 일이라는 걸 미리 깨달아서 그랬는지 오히려 어떤 소리를 들어도 크게 충격받을 것 같진 않았다. 사실은 혼나는 게 두려웠다기보단 나를 전적으로 응원하고 지지해 준 사람에게 실망감을 안겨 줬다는 게 나는 면목이 없었다. 오늘 내가 저지른 일을 후회하고 있을 때 핸드폰에서 알림이 울렸다. 그에게서 온 연락을 확인한 나는 잠깐 내 눈을 의심했다. 정말이지 이건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답변이었다.
잘했다. 그동안 참는다고 수고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