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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예또 Jan 24. 2023

30. 결국 아쉬운 자가 붙잡게 되어있다.

 사실 그도 알고 있었던 거였다. 내가 어떤 인재인지, 그리고 내가 일하던 센터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있었는지. 그렇지만 그는 직접 행동으로 어떤 조치를 취하기보단 그냥 지켜보는 것을 택했다. 경력이 조무래기에 불과한 나에게까지 관심을 쏟기엔 그는 매우 바쁜 사람이기도 했고, 나를 대놓고 본인 관할로 데려오자니 내가 근무했던 센터에서 껄끄럽게 생각할 수도 있는 문제였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렇게 먼발치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던 도중에 성격 급한 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곳을 뛰쳐나와 버렸던 것이었다.


 그는 나에게 뒷수습은 본인이 할 테니 걱정 말고 푹 쉬라고 했다. 그러더니 별안간 직접 와서 사직서를 제출하라는 지점장의 요청을 거절했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약 두세 시간 만에 태도를 단박에 180도로 뒤집었다. "법률 자문을 받았는데 사직서를 직접 제출할 필요가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는 나의 대답에 "네가 회사를 상대로 법으로 이길 수 있을 것 같냐, 회사가 그리 만만해 보이냐."며 "너는 괘씸해서 내가 직접 노동청에 가서 회사가 입은 손해에 대해 고소하겠다."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실망을 할 만큼 남아있는 기대도 없었고 그가 하는 위협이 전혀 무섭게 느껴지지도 않아서 그의 메시지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아예 핸드폰에 관심을 끄고 있다가 나중에야 확인했더니 늦은 저녁에 그가 다시 보낸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내가 너한테 화를 내서 뭐 하겠냐. 너를 너무 믿었는데 네가 남처럼 법을 운운하니 서운해서 그랬다. 오늘은 내가 과음을 한 것 같다. 아까 내가 한 말은 잊고 푹 쉬어라.]


 나는 그 메시지에 대한 대답으로 그에게 숙취해소제 기프티콘을 보냈다. 걱정되니 너무 과음하시지는 말라는 멘트를 덧붙여서. 덩치가 크면 마음도 크게 가지라는 법은 아직 없던 모양이었다.



 퇴사한 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 그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시간 있으면 저녁식사라도 같이 하자는 것이었다. 일련의 사건이 있었지만 그를 다시 보는 게 껄끄러울 정도는 아니었어서 나는 그의 제안에 응했다. 사실은 그동안 내가 겪었던 부당한 일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리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그와 함께 하는 저녁자리 초반의 어색함은 같이 술잔을 한두 잔 기울이자 이내 누그러졌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묻던 그가 갑자기 이런 얘기를 했다.


 여기까지만 하고 트레이너 그만 두기엔 아깝잖아. 다시 해보자. 나랑 같이.


 나는 순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어버버 거렸다. 제안을 받아들이자니 나는 아직 조금 더 쉬고 싶은 것 같았고, 거절하자니 마땅히 세워 놓은 대책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이유들을 막론하고서 그렇게 막무가내로 끝을 내고 도망친 나를 다시 믿고 손을 내밀어주는 그의 마음이 고마웠다. 아니, 어쩌면 그때의 나는 누가 나를 잡아주기만을 기대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야심차게 직장 문을 박차고 나와 백수의 길을 택했던 나의 패기는 그렇게 2주 만에 막을 내렸다. 내가 다시 같은 회사로 돌아오는 게 아니꼬왔던 전 센터 사람들의 방해로 나의 복직이 다시 없던 일이 될 뻔도 했지만 그는 끝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얼마간의 유예기간을 두고 다시 복직하는 것으로 적당한 합의를 본 후 나의 복직 절차는 다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내가 일을 하지 못하게 막고 싶은 그들의 의도는 알겠다만 결과적으로 나는 내가 원했던 만큼 충분히 쉴 수 있었어서 오히려 그들의 방해가 도움이 됐다.


 새로 근무를 하게 된 지점에서 나는 완전히 날아다녔다. 나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던 동료들은 나를 동등한 위치의 트레이너로서 대우해 주었고, '막내 트레이너'라는 꼬리표 때문에 예전 근무지에서 자신감 있게 하지 못했던 일들을 이곳에서는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자 나는 나날이 자신감이 붙었다. 시간이 지나며 동료들과도 친분이 생기고 마음 맞는 회원님들도 하나둘 늘어가자 나는 이 일을 하는 게 너무나 고맙게 느껴졌다. 푸르른 하늘아래 따릉이를 타고 한강을 건너 매일매일 직장에 가는 게 너무 즐거워서 '출근길이 이렇게까지 행복해도 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인생은 왜 꼭 순탄하게만 흘러가라는 법이 없는 건지. 그렇게 동료들과 회원님들의 과분한 사랑을 받으며 새 지점에서 일한 지 5개월쯤 되었을 무렵, 사건이 터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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