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사건도 시작은 미약하다. 그 일도 시작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어느 날 나는 세 달 동안 주 2회씩 꾸준히 운동하시던 회원님께 갑자기 병원을 다니게 되었으니 다음 수업을 취소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어디가 편찮으시냐 물어보니 지난 운동 이후로 팔이 부어서 병원에 갔더니 근섬유 파열 판정을 받아 운동을 잠깐 쉬어야 할 것 같다는 거였다.
간혹 가다 운동량이 과한 경우엔 근육통으로 인해 운동 스케줄을 미루는 경우는 있었지만 병원을 가는 일은 흔치 않아서 나는 진심으로 그녀가 걱정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운동 일지에 적힌 운동기록도 그렇고 내 기억에도 그날 운동량이 평소에 비해 과한 편은 아니었기에 의아했다. 그래도 꽤 깊은 유대감을 나누며 친한 언니같이 여겼던 회원님이었기에 나는 잘 먹고 푹 쉬어서 쾌차하길 바란다며 그녀에게 소고기 선물 세트를 보냈다. 그녀는 이렇게 비싼 거 보내지 말라면서도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겠다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일주일이 지나도 그녀에게서 아무 연락이 없자 나는 다시 근황을 묻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녀는 횡문근 융해증 판정을 받고 입원을 했다가 이제 막 퇴원을 해서 정신이 없으니 나중에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일반인에게는 생소할 횡문근 융해증이라는 병은 사실 운동하는 사람들에겐 꽤나 익숙한 병 중 하나인데, 쉽게 말하자면 근육이 녹는 병이다. 대표적인 증상이 혈뇨를 동반한 극심한 근육통인데 특히 팔과 허벅지의 근육을 과도하게 쓴 경우 종종 이런 일이 발생한다고 했다. 일반적으로는 스피닝 수업 후에 이 증상을 호소하는 회원들이 많은데 음악에 맞춰 정신없이 자전거 페달을 밟다 보면 본인의 한계를 넘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1로 진행되는 PT는 개개인에 맞춰 운동을 진행하기 때문에 오버 트레이닝이 되는 경우가 많지 않다. (대회나 사진 같은 큰 목적이 없는 한 그렇게까지 운동을 시킬 필요가 없기도 하고 말이다.) 게다가 나는 항상 회원님과 상의 하에 운동 부위를 선정하고, 틈틈이 컨디션에 대한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운동 난이도를 조절하며 수업을 진행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문제가 된 마지막 수업 때엔 그녀가 팔뚝살이 고민이라 팔 운동을 하고 싶다기에 큰 근육인 가슴운동으로 시작해 삼두 운동과 코어 운동으로 마무리를 했었는데 언젠가부터 그녀는 이를 두고 "한 시간 내내 삼두운동만 했다."라고 표현하며 불만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보통 운동 경험이 적은 여성의 경우엔 가슴운동을 실시해도 흉근에 자극을 느끼기가 어렵고 비교적 근력이 부족한 팔에서 먼저 자극이 오기 때문에 이를 팔운동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적어도 수업 중에 본인이 힘들다는 표현을 한 번이라도 했다면 나는 즉시 부위운동을 종료하고 대체운동을 찾았을 거였다. 그녀는 그날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웃고 떠들며 기분 좋게 운동을 마치고 돌아갔었다.
약 일주일 뒤에 센터를 방문한 그녀는 달라진 눈빛과 팔짱을 낀 태도로 말미암아 더 이상 내가 알던 그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예 친언니까지 합세해서 함께 온 걸 보니 제대로 따지려고 온 것이 분명했다. 달라진 그녀의 모습처럼 나 또한 가면을 쓰고 나 몰라라 책임을 회피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녀가 입원까지 했다고 한 게 진심으로 걱정이 되어서 보자마자 그녀의 건강과 근황에 대해 걱정스러운 맘으로 물었다. 나의 진심 어린 걱정에도 무미건조한 표정과 기계적인 태도로 답을 하던 그녀는 머지않아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했던 보상은 환불 위약금 없이 남은 수업 회차는 결제한 금액 그대로 환불해 주는 방법이었는데 그녀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세 달간 진행했던 수업까지 전부를 환불받고, 거기에 입원으로 발생한 병원비 및 정신적 피해보상금까지 청구하겠다며 나섰다. 나는 순간 어안이 벙벙해진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세 달간 내가 고민이 있으면 들어주고 웃기는 에피소드나 상사 험담까지 스스럼없이 나누던 그녀는 더 이상 내 앞에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이 일로 생각보다 큰 충격을 받았다. 이미 세 달 동안 진행했던 수업까지 환불해 달라는 이야기는 나의 트레이너로서의 존재가치 전체를 부정당하는 말이었다. 친한 언니처럼 생각했던 그녀가 갑자기 내게 등을 돌린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나는 보험사에 관련 자료를 제출하고 진술서까지 작성해야 했다. 나의 입장을 들은 보험사 직원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트레이닝 과정 중에는 문제가 없었던 것 같은데 정확한 판결은 시간이 조금 걸릴 거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트레이닝 과정 중에 발생한 부상사고에 대해서는 센터 측의 과실이 100%가 나올 수도 있지만 이 사안은 마지막 수업이 진행된 후 약 일주일 후에 입원을 한 경우라서 애매하다는 거였다. 또한 의사표현이 가능한 성인으로서 본인 상태에 대한 의사표현을 하지 않은 것 또한 참작 사항이라면서 일단 상대방이 어떤 증거를 제출하는지 한 번 지켜보자고 했다.
보험사 직원과의 면담이 끝나고 보험사가 나의 결백함을 밝혀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기분이 조금 좋아진 나는 점장님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일이 잘 풀릴 수도 있겠다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쩌다 그녀의 직업에 대해 이야기가 살짝 새어 나왔다. 그녀는 우리나라 3대 언론사 중 한 곳에서 재직 중인 기자였는데, 내 이야기를 듣던 점장님은 이내 뭔가 알았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녀가 갑자기 며칠 만에 태도가 180도 바뀐 것 역시 그녀가 무언가 헬스업계에 대한 약점을 파악하고 우리를 쥐고 흔드는 것 같다는 설명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녀가 센터에 와서 나와 얘기하는 중간중간에 정체불명의 ‘지인’이 계속 등장해 “이런 것, 저런 것까지 다 청구할 수 있다는 거 알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었던 게 기억이 났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직업 때문에 나는 다시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근무했던 곳은 개인이 운영하는 곳이 아닌 서울, 경기권에만 직영점을 20군데 이상 두고 있는 체인형 회사였기 때문에 한 곳의 이미지가 실추되면 다른 센터 역시 피해를 볼 가능성이 있었다. 나의 문제는 바로 그다음 주에 있는 간부 회의에서 거론되었고, 논의 끝에 그녀가 요구하는 대부분의 사항을 수용하고 일을 빨리 덮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이 모든 결정들이 나에겐 ‘능력 불충분’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즐겁던 출근길이 더 이상 즐겁지 않았고, 보람찼던 근무 시간들이 더 이상 기대되지가 않았다. 사회에서 처음으로 크게 맛본 배신감으로 인해 나는 서서히 우울과 무의욕의 상태로 다시 잠겨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