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예또 Jun 12. 2022

28. 회사에서 나라는 존재에 대해 깨닫는 순간

 하필 내가 일을 그만두기 하루 전 날 내 자취방에 오셨던 엄마는 분명 출근을 한다며 아침밥도 잘 챙겨 먹고 집을 나섰던 딸이 네 시간 만에 집으로 다시 돌아오자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엄마, 나 일 그만뒀어." 하자 엄마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망설이는 듯하다가 이내 "그래, 잘했다. 배는 안 고프고?" 하며 내 기분을 살폈다. 어제저녁, 퇴근 후에 함께 야식을 먹으며 직장 생활에 대한 여러 고충을 충분히 설명했던 터라 엄마는 내 갑작스러운 결정에 크게 놀라는 눈치는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 당장 그만 둘 줄은 몰랐던 것 같지만.


 비록 나는 사퇴의사를 당일 날 밝히며 그들에겐 최악의 퇴사를 선사했지만 아무런 책임감 없이 이기적인 행동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미 퇴사를 한참 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던 나는 나의 회원님들과 나의 편이 되어줬던 동료들에게는 최대한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몰래 나름의 퇴사 준비를 해왔었다. 나는 내 담당 회원님들의 자료에 회원님들의 니즈와 운동 수행 능력 및 특이 사항을 꼼꼼히 적어두고 그 밑에는 내가 생각하는 잘 맞을 것 같은 트레이너까지 빠지지 않고 기록해 두었었다. 그리고 혹시나 센터에서 법적 공방으로 나올 것까지 예상해 근무하면서 틈틈이 모아둔 녹음 파일 및 사진, 문서들도 한 곳에 잘 정리해 두었었다. 까딱하면 직장 내 괴롭힘 및 성희롱(이곳에 차마 적을 수 없는 저급한 장난들)으로 맞불을 놓을 작정이었다.



 퇴사하던 그날, 나는 출근시간에 거의 다다랐을 때까지 결정을 하지 못해 센터 바로 앞 지하철 역에서 바삐 나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 우두커니 서서 전송버튼을 눌러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내가 적은 메시지를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으며 고민하다가 미친 듯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고 마침내 떨리는 손으로 전송 버튼을 눌렀다. 메시지가 전송되고 나서 1분, 2분... 그 억겁 같은 1분 1초가 지나 5분쯤 기다렸을까. 내가 문자를 보낸 PT매니저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는 일부러 받지 않았다. 진동이 세네 번쯤 울리다 끊기는가 싶더니 바로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그래, 그렇게 해. 그동안 수고했어.


 그곳과의 인연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수 있는 거였다니. 내가 힘들었던 이유도, 갑자기 그만두는 이유도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받아들여진 나의 초라한 사직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나는 이곳을 그만두기 위해 내가 했던 고민과 망설임이 너무나도 허무하고 아깝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이 사과를 하면서 한 번쯤은 나를 다시 붙잡지 않을까.'같은 생각을 했던 내가 우스워졌다.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서 나 하나쯤은 아무것도 아닌,
아무나 다시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 거구나.



 집에 도착해 나는 바로 내 회원님들에게 나의 사직사실을 알리기 위한 연락을 돌리기 시작했다. 평일 오후 시간대였기 때문에 전화를 받지 못하는 회원님들이 꽤 많았는데, 어쩌다 한 번 전화를 받으면 "선생님, 그만두셨다면서요?"라며 오히려 내게 먼저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랬다. 내가 그만둔다고 말하고 집에 오는 그 한 시간 남짓의 짧은 시간 동안에 PT매니저는 이미 내 담당 회원님들에게 연락을 취했던 거였다. '언제부터 이렇게 일처리를 빨리빨리 했다고?'싶은 생각이 들면서도 '내가 그렇게 그들에게 해치워버리고 싶은 눈엣가시였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내 씁쓸해졌다. 


 센터 측에서 회원님들에게 먼저 연락을 취한 이상 나도 그들을 감싸주기만 할 수는 없었다. 사측과 의견 충돌이 있어 급하게 퇴사를 하게 되었다고, 회사와의 문제를 떠나 회원님께는 정말 죄송하다고 말씀을 드리며 나는 남은 회원님들에게 마저 연락을 다 돌렸다. 마지막 한 분의 연락까지 마치고 나니 나는 바로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몸이 나른 해 지는 게 느껴졌다. 미친 듯이 잠이 쏟아지기 시작해서 침대에 잠깐 누웠다가 그대로 세네 시간을 쥐 죽은 듯이 잤다. 잠에서 깬 후 핸드폰을 확인하니 그 잠깐 사이 수많은 연락들이 쌓여있었다. 그리고 그중엔 의외의 연락도 하나 있었다.


너 폭발했다며?


 나를 직접 교육해 주셨던, 내가 믿고 따르는 총괄 PT매니저였다.

 




이전 10화 27. 을이었던 내가 직장에 할 수 있었던 최고의 복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