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이 있고 다음 날, 출근 준비를 할 때 까진 괜찮았는데 막상 센터 앞에 도착하니 이상하게 들어가기가 망설여졌다. '내가 어제 왜 그랬을까', '한 번만 참을걸 그랬나'와 같은 후회의 감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그러나 어쩌겠나, 이미 엎어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일. 나는 센터 앞에서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고선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걸어 들어갔다. 나는 나름 당당하게 걸어 들어갔다고 기억하는데, 사실 엄청 뚝딱대며 들어갔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내 피해의식 때문인 건지는 몰라도 사무실에 들어갔더니 평소와는 다른 공기의 무게가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출근 인사를 건네는 나를 쳐다보는 팀장님들의 눈빛에는 살기 혹은 측은함이 서려있었는데, 특히 PT매니저님을 오래 알고 지내면서 오른팔처럼 잘 따르던 S팀장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 눈빛으로 말미암아 나는 PT매니저님이 어제 있었던 일들을 모두에게 얘기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고, 나는 나의 죄를 알기에 사자에게 타깃이 된 사슴 새끼처럼 눈을 내리깔고 동료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그날 이후로부터 내게 살갑게 굴며 장난도 자주 치던 S팀장은 더 이상 내게 장난스럽게 굴지 않았다. 그의 달라진 눈빛과 행동은 마치 내게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넌 은혜를 원수로 갚는구나. 싹수없는 새끼.
그 후로 나는 매일 하얗게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상의 재킷의 지퍼를 채우지 않았다고 혼나고, 수업 중에 잠깐 뒷짐을 졌다고 혼나고, 머리를 묶지 않았다고 혼나고, 밥을 10분 이상 먹는다고 혼이 났다. 우리 센터에서 직원에서 제공하는 복지처럼 여겨졌던 [피크시간 제외 개인 운동 및 샤워 자유]라는 조건 역시 별안간 S팀장이 내가 샤워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서는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해 지더니 갑자기 운동 및 샤워는 출근 전에 끝내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그 외에도 예전에는 당연하게 여겨지던 행동들이 내가 하고 나면 금지 항목이 되어버리기 일쑤였고, 점점 타이트해지는 근무 환경 속에서 동료들의 안색은 서서히 어두워졌다. 그게 나로 인한 것임을 모두들 느낄 수 있었기에 나는 가만히 있는데도 계속 죄인이 되었다.
S팀장은 꼭 나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혼을 냈다. 별 거 아닌 일로 꼭 트집을 잡고 툭하면 시말서를 운운했다. 그러던 것이 나중엔 점점 심해져서 동료들에게 단체 기합을 주듯이 나를 혼내면서 회의시간을 오래 끌어 모두에게 피해가 가도록 했다. 그런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날수록 나는 그곳에서 일하는 게 눈치가 보였다. 한 편으로는 이러다가 모두가 나를 싫어하게 될까 봐 겁이 났다.
하루는 여느 때처럼 또 전체 회의 시간에 한바탕 혼이 나고 모두가 떠난 사무실에 혼자 남아 지시받은 업무를 하고 있었는데 사무실에 남아있었는지도 몰랐던 내 뒤에 있던 한 동료가 느닷없이 내 어깨를 토닥였다. 예상치 못한 손길에 그를 쳐다보는데 그 동료는 싱긋 웃더니 "너무 힘들어하지 마. 너 잘하고 있는 거 다 알고 있어. 힘내."라는 말을 남기고선 사무실을 떠났다. 그 말을 듣자마자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이미 울만큼 다 울었던 것 같은데도 속절없이 눈물이 계속 나와서 나는 흐르는 눈물을 연신 닦아내야 했다. 그래도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사무치도록 고마웠다.
언젠가부터 나는 주어진 내 몫을 열심히 해내고 있는데도 잘한 일에는 칭찬 없이 못 한 일만 몇 배는 뻥튀기되어 혼나는 일이 점점 억울하게 느껴졌다. 이제 슬슬 내 인내심의 한계가 다가왔던 거였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모든 상황이 내겐 너무 우스웠다. 본인이 지시하고 조종한 상황임에도 전혀 본인 탓은 없다는 듯이 행동하며 이미지 관리를 하는 PT매니저나, 그 사람 밑에서 충실하게 시키는 대로 나를 갈구는 행동대장 S팀장이나, 어떻게 세뇌를 당했는지 갑자기 나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나버린 내가 잘 따랐던 중견급 여자 트레이너까지. 덩치는 산만한 성인들이 뒤에서는 내 행동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뒷담화를 하고, 괴롭히는 모양새가 정말이지 너무나도 우스웠던 거였다.
한편으론 그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도 추측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번 직원이라고 뽑은 이상 자기 손으로 내치기에는 위에서 보기에 안 좋은 그림이기도 하고, 나도 매출을 경력에 비해 잘하는 편이었으니 그냥 버리기에는 아쉬운 카드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또 일을 잘해서 활개를 치는 모습은 보기가 싫으니 어떻게든 훼방을 놓고 싶은 마음도 들었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그저 하룻강아지인 내가 감히 자기주장을 한 게 괘씸해서 스스로 나가떨어지기를 바랐을 수도 있겠고.
아무튼 이런 것들을 깨달은 이상 나도 더 이상 유치함이 들끓는 그곳에 붙어있기가 싫어졌다. '나는 충분히 다른 곳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는 인재인데 이런 곳에서 고작 이런 대접을 받을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배운 것들과 경험들을 통해 다른 곳에서도 충분히 새 출발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배짱도 있는 것 같았다. 두리뭉실했던 생각이 여러 근거를 통해 확고해지자 하나의 결론으로 이어졌다. 떠나야 할 때가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