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장판 깔다가 까마귀 친구 사귀기

by 최예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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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다음 날 일어나 아침을 먹자마자 다시 흑석동으로 출발했다. 겉으론 내색 않던 아버지도 내심 많이 피곤하셨던 모양인지 어젯밤엔 저녁을 먹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지셨다. 아버지의 팔뚝엔 어제 미처 제대로 지우지 못한 페인트 자국들이 팔뚝 군데군데 남아있었다. 나 역시도 열심히 닦는다고 닦았지만 지워지지 않은 작은 페인트 자국들이 팔과 얼굴에 여전히 남아있었다. 우리는 동화 속에 나오는 굴둑닦이 소년들처럼 서로의 꼴을 보며 한참을 웃었다.


두 번째 페인트칠은 그사이 내공이 쌓인 덕분인지 한 번 덮은 것 위에 다시 덮는 작업이라 그런 건지 첫째날 했던 것보다 훨씬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우리는 어제의 노동으로 팔과 목이 뻐근했지만 오늘이 마지막 페인트칠이라는 생각으로 남은 힘을 더 끌어모았다. 작업은 전 날보다 훨씬 일찍 끝이 났고 우리는 페인트가 잘 마르기를 기대하며 장판을 걷어놓고 집에 돌아와 이틀 동안 푹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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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장판을 까는 일은 페인트칠에 비하면 훨씬 쉬웠다. 장판은 가격대에 따라 시공방법이 달랐지만 나는 그중 가장 저렴한 것을 골랐기 때문에 그냥 방 사이즈에 맞춰 쭉쭉 깔아주기만 하면 되었다. 한쪽에선 내가 잡고 한쪽에선 아버지가 장판을 굴리자 완벽한 2인 1조 팀플레이가 탄생하였다. 페인트칠과 장판작업까지 끝나고 나니 고작 벽과 바닥만 바뀐 건데도 방의 분위기는 완전 180도 변해버렸다. 심플 이즈 더 베스트라고 했던가. 환해진 방을 보자 내 기분도 덩달아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새 장판을 깔았으니 폐장판은 처분해야 했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예전에는 고물상에서 값을 후하게 쳐줘 그냥 문 앞에 내놓기만 해도 주워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는데 요즘엔 값이 떨어져 직접 고물상에 갖다 줘도 안 받을 수도 있다는 거였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집 근처 고물상에 전부 전화를 돌려 보았다. 대부분은 갖다 주면 받긴 하지만 값은 쳐주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던 중에 딱 한 군데에서 얼마라도 조금 값을 쳐준다기에 우린 처분할 장판들을 차에 싣고 약간의 용돈벌이를 기대하며 그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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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판은 꽤나 무겁고 또 꽤나 길었다. SUV 차량에 실어도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로 한참은 삐져나왔다. 아버지의 얼굴을 보려면 고개를 쭉 빼야 해서 고작 폐장판 따위가 아버지와 나 사이에 장벽을 만들었다는 게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한참을 신나게 달려 전화로 얘기해 두었던 고물상에 도착했는데 막상 사장님께서 직접 보시고는 이 장판은 페인트도 군데군데 묻어있고 상태가 좋지 않아 값을 쳐줄 수가 없다는 거였다. '기껏 여기까지 힘들게 싣고 왔는데…'. 기운이 빠졌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폐장판들을 내려놓고 털레털레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기대했던 추가 소득은 없었지만 아예 아무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버지와 나의 힘으로 생에 처음 해보는 셀프 인테리어를 성공적으로 끝마쳤다는 것과 내가 살 집을 내가 직접 고쳤다는 것은 내겐 꽤 큰 의미이자 성과였다. 집에 와서 지친 몸을 침대에 던지고 늘어져 있으니 내 발바닥을 보고 깜짝 놀란 엄마가 빨리 가서 발부터 닦으라고 성화였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내 발바닥을 들여다보았다가 나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건 정말 까마귀가 와서 친구 하자고 해도 미안하다고 해야 할 수준이었다. 이 자리를 빌려 가장 낮은 곳에서 노고가 많으신 나의 발바닥에게 친히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