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턱대고 일단 집을 얻었으니 이젠 나가서 돈을 벌어야 했다. 연기활동을 병행하려면 정직원 개념으로 어느 한 곳에서 진득하니 해야 하는 일은 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파트타임 알바를 구해야 했는데 식당 서빙 같은 일반 알바들은 근무시간 대비 급여 수준이 별로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그렇게 맘에 드는 알바 자리를 물색하던 중에 반가운 연락이 왔다. 같은 학교 후배인 T였다.
T는 중국에서 유학할 때 알게 된 나보다 세 살이 어린 남동생이었다. 졸업 후 귀국하자마자 서울에서 자취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나의 근황을 전하자 그는 한국에서 대학교를 다니며 명동에서 알바를 하고 있다고 했다. 어떤 알바냐 물으니 명동 한복판에 있는 한 SPA브랜드 옷가게에서 중국인 고객들에게 통역을 제공하는 일이라고 설명하면서 아무래도 수준급의 중국어 회화 실력이 필요한 일이니 일반 알바보다는 급여를 조금 더 챙겨 받는다고 했다. 내가 관심을 보이자 T는 점장에게 나를 추천해 보겠다고 했다.
다음 날 점장이라는 사람에게 전화가 왔다. 직접 만나서 면접을 한 번 보고 싶다기에 약속 시간을 잡아 이력서 한 통을 들고 매장에 방문했다. 면접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점장은 나의 첫인상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이 들었는지 간단한 몇 가지 질문들 끝에 쉽게 합격을 시켜주었다. 그는 일단 먼저 일주일에 3일만 출근을 해보자고 했다.
총 네 개의 층 중에서 내 담당은 일 층이 되었다. 일 층은 매장 입구가 위치해 있다 보니 가장 북적이고 정신이 없는 곳이었다. 나의 근무시간은 식사시간 한 시간을 포함하여 총 아홉 시간이었는데, 식사시간 한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여덟 시간은 꼼짝없이 계속 서서 근무를 해야 했다. 중국어 통역 담당으로 들어왔지만 업무의 8할 정도는 고객들이 이리저리 마구잡이로 벌려놓은 옷들을 수습하고 다시 개고 또 개는 일들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2할 정도가 중국인이나 내국인 고객들을 응대해 창고에 가서 사이즈나 재고 수량을 파악하고 가져다주는 일이었는데 이 또한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총 네 층의 매장을 운영해야 했기에 창고 안의 옷들은 항상 빽빽하게 천장까지 쌓여 있었고 고객이 찾는 물건은 평균 성인 여성의 체구인 내가 남의 도움 없이 혼자서 처리할 수 없는 위치에 있을 때도 종종 있었다. 남성 직원들과 똑같은 급여를 받으면서 신체적인 한계로 누군가의 도움 없이 혼자서 일처리를 해낼 수 없다고 느껴질 때마다 나는 무력감을 느꼈다.
일 한지 막 한 달 정도가 되었을 무렵 나는 무력감에 더해 이 일에 대한 회의감까지 들기 시작했다. 상권과 브랜드의 특성상 같이 일하는 동료들은 모두 내 또래의 어린 친구들이었는데 개중엔 나보다 입사 순서가 빨랐다고 텃세를 부리는 직원들도 더러 있었다. 그래도 그건 마음 맞는 동료들과 입방아 한 번 찧으면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중국어 능통'이라는 조건이 필요한 일이었지만 대부분의 업무가 단순 노동식이었고, 처음 들었던 급여조건 역시도 세금 떼고 주변의 비싼 물가에 맞춘 비싼 밥값을 빼고 나면 결국 능력을 더 인정받는 수준도 아니었다는 거였다.
그렇게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지 고민이 깊어가던 와중에 사건은 예기치 못한 날에 갑자기 터졌다. 나랑 나이는 같지만 나보다 직위가 높아 매장을 관리하는 위치에 있던 직원 K가 어느 날 내게 와서 청소업무를 지시했다. 이는 계약서상에 적혀있지도, 여태껏 한 번도 해 보지도, 하고 싶지도 않은 업무였다. 그래도 정중하게 부탁했다면 나도 큰 볼멘소리 없이 한 번쯤 도와줄 수도 있었겠지만 K의 뻔뻔한 뽐새나 말투, 태도를 보자 나는 그 지시를 따르고 싶지 않아졌다. 나는 K를 지그시 바라보다 대꾸했다.
"저 중국어 통역으로 들어온 건데 지금 저보고 청소나 하라고요?"
K는 나의 이런 반응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 같았다. 갑자기 동그란 토끼눈이 되더니 이내 불쾌한 듯한 목소리로 “네, 한 번 해주시면 안 돼요?” 하는 거였다. 이미 한 번 내뱉은 이상 나도 돌이킬 수는 없었다. 나도 그녀처럼 똑같이 목소리에 힘을 주고 말했다.
"계약서상에 청소업무는 없었는데요."
"... 계약서상엔 그렇긴 하지만 지금 매장이 좀 바쁘니까 해주실 수 있는 거잖아요."
"할 수는 있죠. 하지만 그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시키시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죄송해요.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이번 한 번만 도와주시면 앞으론 다신 이런 부탁 안 할게요."
"(한숨 쉬며)네, 이번 한 번 만이에요."
기로 누르려다 실패할걸 알았는지 갑자기 노선을 틀어 살살 달래듯이 말하는 그녀를 나도 더 이상 매몰차게 거절을 할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못 이긴 척 물걸레질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 일이 그렇게 마무리될 줄로만 알았다. 점심밥을 먹고 들어오자 상기된 표정으로 날 찾아와서 왜 갑자기 그만두는 거냐고 호들갑을 떠는 동료를 마주치기 전까진.